사랑에세이 "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 펴내

“오대산이 뼈대가 크고 넉넉한 남편 같은 산이라면 설악산은 화려하고 섬세하며 잘 생긴 애인 같은 산이죠. 저는 남편과 애인 둘 다 닮은 치악산에 산답니다”

강원도 원주시 치악산 자락에 '정박'하고 있는 김선우(35) 시인은 한때 지독한 방랑벽의 소유자였다.

한 달 생활비의 절반을 여행으로 쓰면서 '인생은 여행'이라는 스스로의 여행론에 충실했던 시절이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자유'를 배웠다는 김씨다웠다.

“스님들이 바랑 짐을 꾸리듯 내게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압축할 수 있는 법을 여행을 통과하면서 배웠다”는 김씨가 한 가지 더 습득한 게 있으니, 바로 시작 메모였다. 김씨의 절창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시 '목포항' 또한 여행의 산물이었다.

“목포항이요? 좌판, 복숭아, 비린내, 제웅... 보고 들은 인상적인 것뿐만 아니라 거기서 떠오르는 단어들도 적어 왔어요. 메모에서는 시행을 만들지 않고 이렇게 단어들끼리 거리를 둬요. 행으로 만들어 두면 생각이 그 안에 갇히거든요”

여행에서 돌아온 어느 날 시를 쓰고 싶을 때 김씨가 노트북 옆에 초안으로 꺼내드는 것이 있으니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시작메모들이다.


◆“목욕재계하고 詩 기다려요”

김선우 시인은 한번 시를 쓰기 시작하면 하룻밤에 10편씩 초고를 만든다. 이후 묵혀 두면서 각 편마다 퇴고를 오래 거치는 시 작문 스타일. 시 한편 쓰고 마음에 들도록 OK 할 때까지는 대개 4년씩 걸린단다. 시인에게도 시는 만만한 존재가 아닌가 보다.

4년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을 움켜쥐고 있는 이 하룻밤의 거사를 위해 “목욕재계하고 기다려요” 진지 반 웃음 반 이야기하는 김씨의 눈길만큼은 단호하다. 좋은 시를 만나는 것은 그만큼 시인에게도 준비가 잘 돼 있어야 한다는 김씨.

이렇게 우리 곁에 다가와 손 내미는 김씨의 '농익은' 시편들은 시인이 오래 품고 있었던 만큼 한결같이 살갑고 정겹다. 물살이 오래 오래 다듬어 둥글어진 조약돌처럼 말이다. 이 돌멩이가 던져진 우리 마음에는 자연스레 파문이 일기 마련이다. 시가 구사하는 발길질 또한 시인을 빼닮아 생기발랄하며 물 흐르듯 거침없다.

“저는 너무 어려운 시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문학은 나 혼자 일기장에서 쓰고 마는 게 아니라 소통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시작되는 거잖아요?”

그럼에도 시가 인기리에 팔리지 않는 현실 여건상 시인들의 소통을 위한 몸부림은 안쓰러울 때가 많다. 김씨 또한 “시인이 사실 돈을 많이 벌기를 해 재미있기를 해, 21세기 관점에서 보면 시인처럼 웃기는 직업도 없다”고 단언했다.

세상은 갈수록 놀 것 많고 현란해 지는데 이 와중에 자신을 붙들고 있는 낱낱의 시인은 “사실 들여다 볼수록 신기하고 놀랍다”는 것. 여기 역시나 놀랍고 신기한 '시인' 김씨는 시인을 천형으로 정의했다.

“시인들은 운명적으로 타고 난 것 같아요. 운명이 아니라면 이 지랄(?)들을 하고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까요”


◆“죽음 끝에 만난 詩”

“저는 새빨갱이였어요” 인간 김선우와 시의 만남을 이야기해보라는데 왜 이런 '과격한' 고백이 내뱉어졌을까.

김씨가 시를 쓰게 된 첫걸음이 소위 '운동권' 활동에 이바지하기 위해서였고, 그녀가 시를 업으로 택한 것 또한 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88학번인 김씨는 “지금은 이런 말 하는 게 촌스럽긴 하나 제 대학 4년은 혁명에 바쳐진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모범적이고 내성적인 여고시절을 거쳐 국립대 사대를 택한 '반듯'했던 김씨는 대학에 들어와서야 '광주' 사건을 접하게 됐고 쇼크 상태에 빠져들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김씨는 곧 그 뜨거운 화두에 뛰어들어 강도 높은 운동권 학생이 됐다.

당장 '운동'을 위해 운동권 문학동아리가 필요했다. 김씨는 앞장서 문학동아리를 만들고 회장이 됐다. 그리고 가두시와 집회시들을 쏟아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씨는 항간에 떠도는 '빨갱이 동아리'라는 말을 불식시키고 싶어 모교에서 주최하는 대학문학상에 응모했다. 그리고 그 상은 운동만 아니라 문학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던 김씨를 향해 웃어주었다.

그러나 '뜨거운 화두'에 몸과 맘을 던졌던 화흔은 김씨라고 피해갈 도리가 없었다. 지난 1989년 전교조운동 때에는 운동의 최전선에서 당시 초등학교 교장직을 맡고 있던 아버지와 정면으로 맞닥뜨린 적도 있었단다. 강원도 전역 교장들이 전교조를 막기 위해 대립한 상황에서 딸과 아버지는 그렇게 서로를 마주봤다. 대학 4년 내내 '불효녀'일 수밖에 없었다는 김씨의 말은 절절했다.

이렇게 치열한 4년을 보내고 김씨의 방황과 갈등은 더 깊어졌다. “당시는 민주학생운동의 사향기였죠. 현장으로 들어가려 했던 선들은 끊어지고, 제가 꿈꿔오던 것들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정말 살기가 싫어 구체적으로 자살 방법도 생각해 봤었죠”

그 죽음의 늪에서 만난 삶의 빛 한 줄기가 문득 '시인'이 되어야겠다는 소망이었단다. 그때부터 2년간 눈 뜨자마자 감을 때까지 시만 생각하고 시만 썼으며 96년 등단해 정식 '시인'이 됐다.


◆“우리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편지들”

김선우 시인은 이제 등단 12년차로 우리 문단의 든든한 허리로 뛰고 있다.

실천문학 편집위원을 맡아 한 두주에 한 번꼴은 서울 나들이에 오르고 있으며, 최근에는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을 연재하고 있다.

여기에 무용가 최승희의 일생을 그린 '버라이어티'한 영화 시나리오도 맡아 북한도 오가는 등 분주하다.

한때 여성시인 앞에 흔히 붙던 수식어 '여류'라는 말에 “발칵발칵 화를 냈었다”는 김씨는 그럴 때마다 “당신은 남류시인이시네요”라고 응수하곤 했단다. 그런데 이제 김씨를 소개하는 수식어 어디에도 '여류'는 없다. 김씨는 온전히 '시인'이다.

그런 김씨가 이번에 들고 나온 세 번째 산문집 '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미루나무) 또한 반갑다. 김씨가 시 쓰기 소통의 근간으로 여기는 '사랑' 이야기가 독자에게 띄우는 편지글로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세이집 치고도 김씨 스스로 “낯이 간질간질 했다”는 이 책의 제목은 해당 출판사에서 파블로 네루다의 시구에서 따 왔단다. 사랑시 '달인'인 네루다의 시와 어우러진 김씨의 산문 또한 키스처럼 달콤하다.

시인 김선우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면서 기자에게 건넨 안부가 아직 따끈하다. “사는 거 뭐 있나요?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거죠”

▲ 목포항 -김선우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막배 떠난 항구의 스산함 때문이 아니라
대기실에 쪼그려 앉은 노파의 복숭아 때문에

짓무르고 다친 것들이 안쓰러워
애써 빛깔 좋은 과육을 고르다가
내 몸 속의 상처 덧날 때가 있다

먼 곳을 돌아온 열매여
보이는 상처만 상처가 아니어서
아직 푸른 생애의 안 뜰 이토록 비릿한가

손가락을 더듬어 심장을 찾는다
가끔씩 검불처럼 떨어지는 살비늘
고동소리 들렸던가 사랑했던가
가슴팍에 수십개 바늘을 꽂고도
상처가 상처인 줄 모르는 제웅처럼
피 한방울 후련하게 흘려보지 못하고
휘적휘적 가고 또 오는 목포항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기를

떠나간 막배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

저작권자 © 투데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