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잡지 ‘독도 해녀 실태’ 보고
▲사진=사이포(sapio) 일본 잡지내용 가운데 '독도위안부'관련 자료 | ||
한일문화연구소 김문길 소장(부산외대 명예교수)은 최근 학술연구차 일본 오사카를 방문, 고서적을 취급하는 서점에서 사이포(sapio)라는 일본 잡지내용 가운데 우연히 '독도위안부'관련 자료를 입수했다.
김 소장이 입수한 2006년 5월호 '사이포'에 야마모토 고이치 일본 기자는 울릉도에서 다케시마(竹島)로 고용된 해녀들이 있었다며 다음과 같이 썼다. “음료수도 없고 암초에서 장기간에 걸쳐 남자들만의 생활에 살 맛이 없었으며 식사준비도 매우 힘들었다. 해녀들은 주간에는 바다에서 전복이나 미역을 채취하고 밤이 되면 술시중을 들었으며 그 후 부부 관계를 맺어 오끼섬에 정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이치 기자는 조선 해녀들이 주야로 일을 해 남자들보다 임금을 많이 받았다고 전했다.
'사이포'에는 일본이 1905년 이후 '다케시마어업합자회사'를 차려놓고 물개, 미역, 전복, 소라 등 해산물을 채취키 위해 1941년 제주도에서 해녀 16명을 데려 갔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다.
기사에 따르면, 그 전에도 일본인 3명이 조선인 10여명을 독도에 데려가 전복과 해산물을 독점 채취했다.
당시 독도에는 어업회사 직원들이 살았던 집들이 있었으며 해녀들의 숙소까지 있었다.
▲ 사진='사이포'紙 고이치 일본 기자의 울릉도에서 다케시마(竹島)로 고용된 해녀들이 있었다는 책자 자료 | ||
그는 “대원들이 처녀 12명을 체포했다. 앞뒤에서는 군인들이 총검을 겨누고 있어서 처녀들은 달아나지 못하고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을 치며 고함을 질러댔다.”며 그들 중 코피를 흘린 처녀는 머리를 정신없이 흔들면서 미친 사람처럼 울기도 했다 고 말했다.
세이지 씨는 또 “징용된 해녀들의 숙소는 공병중대에 부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공병중대의 중위에게 부탁하자 일본인 중위는 강제 연행된 해녀들을 자료창고에 수용하면 병사들이 좋아 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자신이 연행한 해녀가 모두 206명 이었고, 그들을 주로 군부대 위안소에 냈으며 가끔 민간기업의 현장에 보내기도 했다”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