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에선 기대 접더라도 핵심 역량 지켜내야

김성기 부회장
▲ 김성기 부회장

 

전국 15개 대학 녹색원자력학생연대와 교수, 전문가들이 주도해온 ‘탈원전반대 및 신한울 3·4호기 건설재개를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에 참여한 인원이 63만명 선에 도달했다. 2018년 말 서명운동이 시작된 이후 온라인과 자필서명을 통해 꾸준히 참여 폭을 키웠지만 지난 4월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한 이후 증가세가 다소 무뎌진 모습이다. 정부와 여당이 탈원전에 앞장섰고 야당인 미래통합당이 당론으로 반대했던 이슈라서 선거 결과에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대표들과의 오찬에서 탈원전 정책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다시 한번 밝혔다. 문 대통령은 “신한울 3·4호기 건설중단 등 탈원전 정책을 재고해달라”는 주호영 통합당 원내대표의 발언에 대해 한마디로 잘라 거절했다. 전력예비율이 30%를 넘어 에너지공급이 끄떡없는 상황이라서 추가 원전 건설은 불필요하다는 게 문 대통령의 답변이었다고 주 원내대표가 전했다.
 
여당 압승과 함께 예상됐던 답변이기는 하지만 누가 뭐래도 탈원전은 초지일관 그대로 간다는 문 대통령의 생각이 철벽처럼 느껴진다. 그 바탕에는 원전 산업은 포기해야 마땅한 위험한 분야이며 원전이 없어도, 원전 기술이 없어도 앞으로 에너지 수급에는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꽉 막힌 계산이 깔려 있다. 63만여 명에 이르는 반대 서명은 잘못된 판단과 오해에서 비롯된 행위쯤으로 받아들여 졌을까.
 
코로나19 감염자가 여전히 속출하고 경제위기의 파장이 무섭게 확산하는 추세지만 문 대통령의 경제분야 대응에는 애초부터 탈원전 재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전이 전기에너지를 비교적 싼값에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대기오염도 줄일 수 있는 방안이지만 만약 사고가 발생할 경우 그 피해가 워낙 심각하므로 미리 줄여나가는 게 현명하다는 게 탈원전 정책의 배경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원자력 학계와 원전 산업계 전문가들은 탈원전 정책의 한계와 문제점을 분석, 경제를 살리고 국민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안전대책을 강화한 원전 산업을 꾸준히 육성해야 한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해왔다. 탈원전 반대 서명운동은 전문가 의견과 여론의 결정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토록 흔들림 없이 꿋꿋한 정부를 향해 서명운동과 청원을 지속하는 일은 이제 무의미해 보인다. 최소한 문 대통령의 임기중에는 탈원전에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든다. 청와대의 안중에도 없는 서명운동은 차라리 접어두고 임기 이후에 대비한 연명책을 세워야 한다는 비장한 의견이 원전 산업계에서 나온다. 생존을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동면기에 대비하자는 제안이다. 당장은 원전 건설이 중단돼 일감이 떨어지고 전문가와 기술인력이 직장을 잃는 한파를 겪는다 해도 핵심 기술과 인력만은 어떻게든 살아남게 하는 지혜를 요구한다.
 
두산중공업을 비롯한 국내 원전업계는 탈원전의 영향으로 빈사상태에 빠진지 오래다. 2016년 영업이익 2800억원을 냈던 두산중공업은 원전건설이 중단되면서 지난해 순손실 4950억원을 기록했다. 정부는 두산건설에 대한 과도한 지원 등 부실경영 탓이라고 지적하지만 회사측은 탈원전으로 원전 건설 수주가 끊긴 게 부실화의 근본원인이라고 분석한다. 정부와 채권단은 두산중공업의 자구노력을 조건으로 이미 2조4000천원을 지원했고 1조2000억원을 추가하기로 했다. 원전업계는 내년 3월 신고리 5·6호기 설비 납품이 완료되고 나면 부품업체부터 문을 닫기 시작해 원전 산업 전체가 숨 막히는 위기에 직면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막다른 처지에 몰린 두산중공업은 원전사업을 포기하고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앞세운 소위 ‘친환경 에너지 기업’으로 전환하겠다는 방침까지 밝혔다.
 
최근 러시아와 중국이 세계 원전시장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과거 원전 사고로 한동안 위축돼 있던 미국과 일본이 견제에 나서기 위해 경쟁력 강화에 나섰다는 소식이 들린다. 1979년 스리마일 원전사고로 한동안 원전 건설을 중단했던 미국은 2013년 보그틀원전 3·4호기를 착공하고 차세대 원전개발에 나섰다. 그동안 미국내 원전 산업계가 무너진 상태여서 차세대 개발에 두산중공업의 참여를 요청했다고 한다.
 
코로나19 이후 경제회생을 위한 한국형 뉴딜 정책이 본격 논의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AI)과 디지털 정보를 활용한 4차 산업을 중심으로 정책 구상이 몰려 있다. 4차 산업혁명에는 안정적으로 싼값에 전력을 공급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바로 원전이다. 4차 산업에는 데이터 센터와 전기차, 사물인터넷, 스마트 팩토리, 스마트 농업 등이 주요 분야로 꼽히는데 모두가 전력소비가 크다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 동면기를 겪더라도 차세대 원전 개발에 필요한 인력과 기술을 반드시 살려 두어야 할 이유다.
 
정책 방향이 잘못되면 그 피해는 민간부문에 돌아갈 수밖에. 학계와 산업계는 외형을 줄이고 일정 부분 피해를 감수하면서라도 원전 핵심 기술을 유지, 개발하고 인력 유출을 최대한 막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해외 연구기관이나 업체로 나간 전문인력을 다시 불러들여 함께 도전에 나설 때를 기약하면서. 두산중공업의 신재생에너지 사업 전환 선언이 연명을 위한 일시적 자구책이거나 위장 보호색으로 해석되는 배경이다. <투데이코리아 부회장>
 
필자약력
△전)국민일보 논설실장, 발행인 겸 대표이사
△전)한국신문협회 이사(2013년)
△전)한국신문상 심사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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