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른 하늘 푸른 산, 세상은 덧없고 나도 조용히 가네’
한 번쯤은 해보고 싶던 취잿길에 나섰다. ‘그들’과 조금이라도 섞이고자 2주 넘도록 수염도 안 잘랐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은 24일 오후. 서울역 노숙에 사용할 침낭과 패딩 점퍼, 노숙인들의 목소리를 담을 노트와 펜을 가방에 욱여넣고 집을 나섰다.
서울역으로 가는 지하철 1호선에 올랐다. 취재 일정으로 자주 향하던 곳이지만, 이날의 서울은 일상이 아닌 외지로 가는 듯 허파가 부풀며 별안간 긴장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여행의 목적으로 밟은 땅은 매순간이 설레고 즐겁겠지만, 갑자기 그곳에서 살아내라고 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라도 막막할 뿐이다.
오후 4시30분 서울역 입구. 길거리에 놓인 여러 대의 스피커에서는 찬송가와 알 수 없는 종교들의 노래가 화합되지 않은 채 섞였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로 분주히 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에서 ‘달팽이’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울역 3번 출구로 나오자 번호 없는 지하 출입구가 보였다. 사람들은 왠지 이곳을 피하는 듯 했다. 근처를 지나던 한 행인에게 묻자 “여기 무서워서 잘 안 다닌다”고 했다. 내려가 보니 황망할 만치 뻥 뚫린 지하통로 귀퉁이에 몇 사람들이 얇은 이불을 겹쳐 덮고 누워있었다.
◇ “가장 힘들 때? 지켜야할 사람이 없는데 나는 살아있다는 것”
오후 6시20분. 다시 서울역 앞으로 갔다. 계단 앞에서 여러 겹 쌓은 박스를 의자 삼고, 1.8ℓ 페트병 소주에 투명 비닐봉지 속 가득한 방울토마토를 안주 삼으며 마주 앉아 있던 노쇠한 한 쌍의 노숙인에게 다가갔다. 이 아무개(64)씨와 박순옥(71)씨다.
이씨와 박씨는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기자의 부탁에 경계하는 듯 했으나, 약간의 취기가 있던 덕분인지 곧 합석할 수 있었다. 가방을 몸 옆에 두고 박스 위에 앉으니 박씨가 “기사님, 가방 그렇게 두면 누가 훔쳐가니 잘 챙겨야해”라며 수차례 당부했다. 그러길 내내 ‘기사님’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자신이 지적장애가 있다고 했다.
이씨는 자신과 박씨의 사연을 풀었다. 매일 박스를 주워 생계를 이어간다는 이씨는 “이사람(박씨)이 연약하고 정신도 없고 하니까 이상한 놈(다른 남성 노숙인)들이 와서 성적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고, 노인연금 30만원 받는 거 등쳐먹으려 하고 그러더란 말이야. 그래서 내가 이건 도저히 아니다 싶어 2년 전부터 이사람 지키고 있어”라고 했다.
대화를 듣던 박씨가 컵라면과 소주를 부탁했다. 코앞 편의점으로 갔다. 가면서 의심했다. ‘설마 가방 훔쳐가진 않겠지.’ 부랴부랴 컵라면에 물 붓고, 소주는 겨드랑이에 끼우고 편의점을 나왔다. 자리로 가니 박씨가 가방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컵라면과 소주 한 병에 연신 “기사님, 감사해요”라고 했다. 자괴감이 의심을 비웃듯 밀어 쳤다.
1시간 이상 이어진 대화의 끝자락, 식수는 어디서 떠오는지 물었다. 이씨는 생수 살 돈이 아까워 서울역 인근 화장실 수돗물을 마신다고 했다. 그가 일러준 화장실로 향했다. 그 길 가운데 통유리창으로 둘러진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연인이 마주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불과 30m 떨어진 거리에서 화장실 수돗물과 와인이 대비됐다.
→ ②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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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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