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당사자 배제된 합의에 두 번 우는 피해자들
2025-02-27 진민석 기자
박근혜 당시 정부에 의해 한일 양국 간 가장 민감한 역사 문제로도 인식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연내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타결되긴 어렵다”고 밝힌 신조 아베 당시 일본 총리의 입장과는 달리 박근혜 정부는 ‘연내 타결’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당시 정부는 전격 타결하게 된 경위에 대한 질의에 “피해자분들 중 합의 당시 46명만 살아계신 상황에서 피해자분들이 한 분이라도 더 살아 계실 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합의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다만, 정부의 설명과는 달리 실상은 현저히 달랐다.
전문가 일각에서는 이를 박정희 대통령이 성사시킨 ‘국교 정상화 50주년’이었던 2015년에 한일 양국의 역사적 사안에 대한 합의를 이루고자 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의사가 적절히 반영된 결과라고도 분석한다.
너무 급한 탓이었을까, 세간에서는 이를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밀실 협상’에 의한 ‘문제 많은 합의’라고도 평가했다.
적법성과 당위성을 차치하고라도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할 내용들이 배제됐다는 것이 한국 사회의 시각이었다.
특히 당연히 배석해야 하는 문제의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좌석은 양국 합의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양현아 서울대 법학과 교수는 “피해자를 협상과 협의의 주체로 여기지 않고 기껏해야 배상의 객체 정도로 위치 짓고 있다는 점이 가장 문제적”이라는 비판을 내놓기도 했다.
합의가 급급했던 양 정부의 ‘졸속 추진’에 위안부 피해자들은 두 번 울 수밖에 없었다.
지난 1992년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린 故(고) 김복동 할머니(1926~2019)는 “얼마나 늙은이들을 무시했으면 우리도 모르게 해놓고 타결이라고 하냐”며 당시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이러한 광경은 이번엔 백악관에 의해 재현되고 있다.
지난 17일(현지시간) 미국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첫 회동을 가졌다.
이는 2022년 2월 24일을 기해 발발한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 당국과 단절됐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대화를 지난 1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개하면서 전쟁을 신속하게 마무리 짓기로 한 데 따른 것이다.
문제는 이번 리야드 회담에는 지난 3년간 6만8200여㎢에 달하는 국토를 러시아군에 빼앗기고 10만명에 가까운 군인과 민간인이 숨진 우크라이나는 물론 우크라이나를 지원한 나토의 유럽국가들은 배제됐다는 점에 있다.
특히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 자체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알려주지 않았을뿐더러, 통보 또한 나중에 진행된 것으로 확인됐다.
2기 집권이 시작되면서 무던히 친(親)러시아 행보를 걷는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과의 통화 직후 “러시아가 빼앗은 땅은 많은 피를 쟁취한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2014년 이전(크림반도 병합 이전) 영토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며 국제법을 무시하고 다른 나라에 대한 무력 침공을 합리화하는 듯한 발언을 일삼았다.
이를 의식한 듯 트럼프 대통령은 리야드 회담을 앞두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러시아·우크라이나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 매우 열심히 일하고 있다”며 “우크라이나도 협상에 낄 것”이라고 상당히 약소한 선물을 선심 쓰듯 내밀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 NBC 방송에 “우리 참여 없이 우리에 대해 푸틴과 딜을 맺을 수 있는 지도자는 전 세계에 없다”며 “우크라이나의 참여 없는 미국과 러시아 간 어떠한 결정도 결코 수용하지 않겠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이같은 종전 논의 흐름을 두고서 일각에선 ‘1938년 뮌헨협정’을 비유하고 있다.
서방 외교정책의 대표적 흑역사로 꼽히는 ‘유화정책’(appeasement)은 1938년 9월 나치 독일, 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등 4개국이 체결한 뮌헨협정은 나치 독일이 체코의 주데텐란트를 할양받는 조건으로 더는 영토 확장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듬해 체코의 남은 국토까지 병합한 데 이어 폴란드에도 영토 할양을 요구했고, 폴란드가 이를 거절하자 1939년 9월 독일군이 폴란드를 공격하며 2차대전이 일어난 바 있다.
이같이 급물살을 타는 종전 협의 속 논란 많은 트럼프식 ‘종전 가이드라인’에 대(對)러시아 제재와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 협력을 통해 어느 때보다 똘똘 뭉쳤던 대서양 동맹의 근간을 자칫 흔들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다수의 횡포식 대전제 아래 합의 도출에 급급해 졸속으로 추진한 사회적 합치는 긍정적 결괏값으로 귀결되기는 어렵다.
지난해 9월 7일을 기준으로 한국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생존자는 단 7명이다.
졸속으로 추진된 ‘밀실 합의’에 233명의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당했던 치욕과 오욕을 씻어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합의란 둘 이상의 당사자가 상호조정에 의해 공통의 견해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 두 개의 사태에서 자리한 당사자는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