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영화 ‘두 교황’과 프란치스코 교황이 보여준 탈권위로의 ‘변화’

2025-05-08     김준혁 기자
▲ 김준혁 경제산업부 기자
지난 4월 21일 혼란스러운 현대의 흐름 속 약자들의 빛이 되어주던 성인(聖人)이 우리의 곁을 떠났다.
 
‘빈자(貧者)의 성자’로 불린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13년 교황에 취임한 이후, 약 12년의 시간 동안 현대 사회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찾았으며 동성 커플에 대해 가톨릭 사제의 축복을 허용하는 등 가장 진보적인 교황이란 평가를 받아왔다.
 
그는 떠나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단 100달러만을 재산으로 남긴 사실이 알려지는 등 자신보다는 약한 자들을 위한 삶을 살아갔다.
 
이 같은 프란치스코의 행적에 그의 마지막을 기리는 장례 미사에 약 40만명의 인파가 몰리고 세계 각국 정상들이 함께하며 전 세계가 그가 떠나가는 길을 배웅해줬다.
 
비록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를 추억하고 기억하려는 이들의 모습은 여전했다.

특히 프란치스코의 선종 이후 영화 ‘두 교황’에 대한 관심이 다시 급증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온라인 스트리밍 시장조사업체 루미네이트에 따르면 넷플릭스에서의 ‘두 교황’의 시청 시간은 지난달 20일 29만분에서 선종 당일인 21일 150만분으로 5배 이상 크게 증가했다.
 
해당 영화는 베네딕토 16세의 자진퇴위와 프란치스코의 콘클라베 선출 사이 기간 동안 두 사람의 사흘간의 대화를 다룬 것으로, 두 사람의 행적을 바탕으로 제작됐으나 가공된 현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과는 다른 점이 분명 존재한다.
 
그럼에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성인’을 기억하고, 그의 뜻을 기리고, 영화 자체를 통한 또 다른 생각거리를 가져볼 수 있다는 점에서 프란치스코를 다룬 수작 영화가 존재한다는 점은 큰 위안거리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 이후의 지난 2005년 콘클라베 시기로부터 시작한다.
 
차기 교황 자리를 놓고 교회의 원리원칙을 강조하는 라칭거 추기경(베네딕토 16세)과 교회의 개방을 추구하는 베르고골리오 추기경(프란치스코) 사이 묘한 갈등의 분위기가 그려진다.
 
같은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하는 두 추기경이었지만 추구하는 가치관의 차이에,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을 것만 성향 차이를 보인다.
 
이후 영화는 2013년으로 두 사람을 이끌고 간다.
 
베네딕토 16세는 잇따른 교회의 성추문, 비리 등으로 인해 압박을 받고 있었으며 베르고골리오 추기경은 추기경의 자리에서 물러나 은퇴를 원하고 있었다.
 
이 같은 시기, 베네딕토 16세가 베르골리오 추기경을 초대하고,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교황으로부터 은퇴를 허락받기 위해 로마로 향하면서 영화의 본격적인 내용이 진행된다.
 
8년 만에 두 사람이었음에도 둘 사이의 가치관 차이는 조금도 좁혀지지 못했다. 여전히 베네딕토 16세는 원리원칙을 강조했으며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개혁, 개방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은 시간을 함께하고 서로의 취미 등을 나누며 벽을 점차 허물어간다. 그럼에도 베네딕토 16세는 베르골리오 추기경의 은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관련 대화를 피할 뿐이다.
 
베르골리오 추기경의 은퇴 요청이 반복되자 베네딕토 16세는 그제야 본인이 왜 그를 아르헨티나에서 로마로 불러들였는지 속내를 밝힌다.
 
베네딕토 16세는 위기의 빠진 교회를 구해낼 자로 자신과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개혁과 개방을 중시한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적임자란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 순간 영화는 미묘한 변화를 보여준다. 가장 원리원칙을 중시한 교황이 약 700년만의 자진 퇴위라는 가장 개혁적인 방법을 꺼내들었으며 개혁을 외치던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교황은 사임할 수 없는 자리라며 이를 말리려든다.
 
이처럼 영화는 ‘변화’를 주요 테마로 잡고 잔잔하면서도 무게감 있게 밀어붙인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두 인물의 입을 통해 ‘타협’과 ‘변화’에 대해 명백히 선을 긋는다. 베르고골리오 추기경은 동성애 허용 등 개방적인 자신의 모습에 대한 교황의 ‘세상과의 타협’이 아니냐는 비판에 ‘변화’라고 대응한다.
 
베네딕토 16세 또한 교회의 위기 속 사임하려는 선택에 대한 베르고골리오의 ‘타협’이 아니냐는 지적에 ‘변화’라고 그의 말을 되돌려준다.
 
언뜻 보면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두 단어에 대해 영화는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 명확한 차이점을 부각한다.
 
시종일관 변화를 외쳐온 베르고골리오 추기경은 자신이 교황자리를 물려받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세상과 ‘타협’했던 과거를 꺼내든다.
 
베르고골리오는 1970년대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시절 사제들과 신도들을 구하기 위해 군부와 타협하고 협상했던 과거를 부끄럽게 여겼다.
 
그는 교회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신념을 타협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했으며 이는 변화가 아닌 타협으로 여겼다.
 
물론 이 또한 군부의 폭력성 아래 무고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또 하나의 최선을 선택이란 점에서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음에도 교회의 권위와 생존을 우선시 했다는 점에서 그는 이를 자신의 과오로 여기고 있던 것이었다.
 
이 지점에서 영화가 보여주는 ‘변화’와 ‘타협’의 차이는 명확해진다.
 
‘변화’는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는 과정이며 ‘타협’은 권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변명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베르고골리오가 추구한 ‘변화’는 자신과 교회의 권위를 내려놓고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약자에게 다가가고자 함이었다.
 
마찬가지로 베네딕토 16세가 사임이라는 ‘변화’를 꺼내든 이유는 자신의 권위를 포기함으로써 위기에 빠진 교회를 구하고 도리어 교회의 권위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반면 ‘타협’은 권위를 지키기 위한 본인의 행동에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일종의 상황적 변명을 내세운다.
 
영화 속 두 ‘교황’은 행위와 선택의 결과가 아닌 자신의 양심을 근거로 ‘변화’와 ‘타협’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성인(聖人)의 면모를 보여줬다.
 
물론 두 교황이 보여준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현실 속 일화가 아닌 영화가 제시한 해석이지만 현실의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자신과 교회의 권위를 내려놓는 변화의 선택을 통해 오히려 권위를 되살리는 성자의 모습을 보였다.
 
이 같은 프란치스코의 모습은 특히 현재의 국제 정세 속에서 가장 요구되는 자세라는 점에서 그의 행적을 다시 되새길 필요가 있다.
 
국가 간 관계가 화합에서 갈등과 분열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리더들이 변화는 거부한 채 자신의 신념과 권위만 내세우지는 않았는지 반성이 필요하며 우리나라를 포함한 각국의 내부 정치에서 또한 발전을 위한 변화는 사라진 채 권위를 지키기 위한 아집만 남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할 시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보여준 권위를 내려놓는 변화를 시작할 때 비로소 안정과 발전의 길에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