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선진 금융 기술?”···영화 ‘소주전쟁’이 상법 개정에 던지는 질문

2025-08-07     서승리 기자
▲ 서승리 경제산업부 기자
“선진 금융 기술이라고 해두죠”
 
최근 개봉한 영화 ‘소주전쟁’에서 최인범 역을 맡은 배우 이제훈의 대사 중 한 구절이다. 최인범은 대형 글로벌 사모펀드 소속 인수 전문가로, 치밀한 재무 전략과 법률지식을 활용해 영화에 등장하는 소주회사 ‘국보소주’의 경영권을 탈취하려는 인물로 등장한다.
 
해당 영화는 과거 1990년대 후반 진로그룹이 IMF 외환위기 당시 골드만삭스에 의해 핵심 사업부를 매각당하게 되는 실제 사례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국보소주의 경영권 찬탈 배경에는 외환위기와 재정악화 등이 주요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영화는 해외 자본의 적대적 접근으로부터 국내 기업이 스스로를 방어할 제도적 장치가 충분했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을 떠오르게 한다.
 
최근 한국에서 상법 개정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기업 지배구조를 둘러싼 다양한 제도적 고민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일부 경영계와 법조계, 정책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포이즌필’(Poison Pill)과 ‘차등의결권’제도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이들 제도가 단순한 경영권 방어 수단을 넘어 주주가치와 기업의 장기성장을 조화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 기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요구되고 있다.
 
현재 한국 상법은 원칙적으로 모든 주식에 1주 1의결권 원칙을 적용하고 있으며, 적대적 M&A를 방어할 수 있는 법적 장치는 매우 미비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국내 기업들은 지배구조를 방어하기 위해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나 우회적인 계열 지배 방식에 의존해왔고, 이로 인한 비효율성과 불투명성이 지속적으로 지적되어 왔다.
 
반면, 선진국 사례를 보면 일정한 조건 하에서 경영권 보호 장치를 인정하는 동시에, 주주의 권익 보호와 기업의 투명성 확보를 병행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설계되어 있다.
 
먼저 포이즌필은 적대적 M&A 시도에 맞서기 위한 일종의 ‘독약 조항’으로, 특정 주주가 일정 지분 이상을 확보하면 기존 주주들에게 대량으로 신주를 발행하거나 주식을 싸게 살 수 있는 권리(신주인수권)를 부여해 지분 희석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이 제도는 미국을 비롯해 일본, 프랑스 등에서 널리 활용되며, 단기 수익을 노리는 투기적 자본의 침투를 막고 장기적 경영 안정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포이즌필이 경영진의 기득권 보호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하지만, 주주총회 승인 등 견제 장치를 병행하면 남용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 충분히 설계 가능하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차등의결권 제도 역시 경영권 방어와 성장 지원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는 일정 조건 하에서 보통주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주식 구조를 허용하는 제도로, 창업주나 핵심 기술 인력에게 경영권을 집중시켜 장기 비전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다.
 
이미 미국의 구글, 메타(구 페이스북), 아마존 등 빅테크 기업들은 차등의결권을 통해 창업자의 비전과 자율성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기업가치도 장기적으로 크게 제고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 한국에서도 벤처·스타트업계 중심으로 차등의결권 도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배경이다.
 
물론 이 같은 제도가 오히려 경영진의 독단적 선택을 강화하고 소액주주의 권익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다만, 기업의 단계나 업종에 따라 도입 요건을 차등화하는 방안 등을 통해 이러한 부작용을 충분히 조절할 수 있다. 실제로 주요 OECD 국가들은 대부분 이러한 제도적 장치를 병행함으로써 균형을 맞추고 있다.
 
한국은 지금까지 ‘투명성’과 ‘주주 친화’라는 명분 아래 일률적인 제도만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이 보다 장기적 비전과 혁신 투자에 집중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 단기 주가 부양이나 경영권 방어만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기업의 성장성과 주주의 이익이 동시에 보호되는 ‘선진형 지배구조 시스템’으로 진화해야 한다.
 
상법 개정은 단순히 몇 개 조항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한국 경제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기업과 투자자, 그리고 소비자 사이의 신뢰의 기초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이고 섬세한 접근법이 담겨야한다.
 
이제는 경영권 보호와 주주가치 제고가 상충하는 개념이 아닌, 서로를 보완하는 구조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상법 개정 논의가 단지 정치적 논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경쟁력과 시장의 투명성을 함께 높일 수 있는 실질적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포이즌필과 차등의결권과 같은 제도에 대한 고찰은 바로 그 균형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