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채 칼럼] 보이스피싱 근절 대책 서둘러야
2025-09-12 박현채 주필
보이스피싱 범죄가 횡행하기 시작한 2006년부터 19년 동안 관련 부처에서 쏟아낸 대책은 140여 차례에 달한다. 그런데도 피해 규모가 줄어들기는커녕 매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보이스피싱 조직들이 인공지능(AI)과 딥페이크 등 선진기술을 폭넓게 활용하면서 고도의 시나리오를 통해 악랄하게 개인의 재산을 갈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스피싱 범죄는 갈수록 수법이 교묘해지고 지능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담해지고 있다. 보이스피싱 업자는 소비자들을 속이기 위해 보이스피싱을 감독하는 금융감독원 공식 홈페이지에 정식 등록을 시도하다 발각되기도 했다. 또한 부고 문자 등 피해자가 열어보지 않을 수 없는 불법 스팸을 보내 휴대전화에 악성앱 설치를 유도한 뒤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탈취하거나 휴대전화를 제어하는 방법 등으로 범죄를 저지른다. 수법이 너무나도 정교해 예방 교육만으로는 대응이 불가능한 단계에 도달, ‘오죽 허술하면 속느냐’는 식으로 개인의 탓으로만 돌릴 때는 이미 지났다.
우리나라 AI 정책과 기술 전략 수립 전문가인 배경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조차도 쓰레기 무단 투기를 했다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악성 링크를 누를 뻔한 적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통신 분야에 해박한 이런 전문가도 피싱 문자를 받고 헷갈릴 정도인데 일반 시민들은 어떻겠는가.
지난해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전년의 2배에 가까운 8545억 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올해도 7월까지 벌써 7766억 원에 달해 전년동기 대비 두 배 가까이 급증했다.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연말엔 1조 원을 돌파할 전망이다. 하지만 피해자가 환급받은 금액은 미미하다. 2015년부터 지난 3월까지 10년 동안 보이스피싱 피해 규모는 2조 8281억 원에 달했지만, 이 중 피해자가 환급받은 금액은 7935억 원(약 28%)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최근 금융회사의 무과실책임을 인정하는 영국·싱가포르 등 해외국가 사례를 참고, 제도개선 방안을 입법화하기로 했다. 물론 고의나 과실이 없는 금융사에까지 배상책임을 지우는 것이 지나치다는 주장이 대두될 수 있다. 또한 현실적인 관리 한계를 고려할 때, 대리점이나 판매점의 휴대폰 불법 개통을 이유로 이동통신사의 등록 취소나 영업정지까지 거론하는 것도 과하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최근 5년여 동안 국내 6대 은행에서 보이스피싱 범죄에 악용된 계좌 수만도 15만 개를 넘어섰다. 올해 1분기에도 1만 개를 넘어서 작년 1년 동안 정지된 계좌 수의 32.4%나 됐다. 우리 금융보안 체계에 큰 구멍이 뚫려있다는 얘기다. 은행 계좌가 보이스피싱에 활용되는 만큼 금융사에 '예방 책임'이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또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악성 메시지 전송을 차단하고 전화번호 위·변조 여부를 확인해 수신을 차단하는 것은 이동통신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금융회사와 이통사에 피해 배상 책임을 부여할 경우 실질적으로 피해 구제가 이뤄지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보이스피싱 방지 노력으로 이어져 1석2조의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외국인 명의로 개통된 대포폰이 주요 범행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점을 감안, 이에 적극 대처하는 방안도 구체화해야 한다. 경찰청에 따르면, 외국인 명의 대포폰은 2022년 7295건에서 지난해 7만1416건으로 폭증했다. 이 중 상당수가 범죄와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가 참고하기로 한 영국과 싱가포르도 무조건 배상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영국은 송금 은행과 수취 은행이 절반씩 책임을 지되, 고객이 공모했거나 합리적인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경우에는 환급을 거부할 수 있다. 금융사는 물론 통신사에도 배상 책임을 부과하고 있는 싱가포르도 은행과 이통사의 의무 이행 여부를 먼저 따져 문제가 없으면 고객이 손실을 부담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 만큼 정부는 금융사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고 국민의 도덕적 해이 가능성 등을 고려한 뒤 균형 잡힌 구체적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개인의 경각심, 수사기관의 강력한 의지, 그리고 금융기관과 이통사의 책임 있는 자세가 한데 어우러질 때 비로소 보이스피싱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투데이코리아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