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세상에서 가장 쉽지만 어려운 것
2025-09-22 김신웅 편집국장
특히 소통하기 위해서는 ‘말’도 필요하다. 말도 소통만큼 어려운 존재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한국의 속담이 있을 정도로 ‘말’은 뱉기는 쉬우나 주어서 담을 수 없는 게 ‘말’이다. 카카오톡이나 텔레그램, DM 등의 메시지를 삭제할 수 있는 것과 다르게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현실에서 삭제할 순 없다. 그러기에 말하기 전까지 수만 번의 머릿속에서 고민을 되뇌어 신중하게 내뱉어야 한다. 그 한마디로 오해가 쌓이거나 논란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쉬우면서도 어려운 ‘소통’을 잘하기 위해서는 ‘말’을 신중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의 존중도 못지않게 필요하다. 지시하는 듯한 어조는 소통이라 할 수 없다. 상대방의 눈높이에서 맞춰서 말하는 것이 ‘소통’의 첫 번째 단계이다.
이러한 ‘소통’과 ‘말의 중요성은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적인 내용이지만, 최근 정치권과 일부 기업들의 행태를 보면 이를 망각한 것 같다는 의구심이 나오고 있다.
특히 기업의 대내외적인 이미지를 관리하고 홍보하는 조직인 홍보팀의 경우 영문명을 ‘public relation’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PR이라고 줄여서 사용하는 이 단어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관계(relation)’이다. 이는 미디어 즉 기자와의 관계 외에도 대중과의 관계 등으로 폭넓게 바라볼 수도 있다. 그만큼 ‘소통’이 필수인 부서이다.
올해 초 모 통신사가 자사 서비스에 해킹사태가 발생한 것과 관련해 자진 신고했지만 논란이 커지자 꺼내든 카드는 매일 ‘일일브리핑’을 연 것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수백개의 기사와 수많은 비판에도 숨지 않고 당당하게 사실(Fact) 관계 위주로 기자를 통해 대중들에게 설명했다. 이를 통해 잘못된 사실은 바로잡히고, 오해에서 시작된 혼란은 빠르게 수습되어갔다. 당시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지금 와서 보면 발 빠른 홍보 전략이 빛났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 후 몇 달 뒤 다른 통신사에서도 해킹 의혹사태가 발생했다. 하지만 해당 통신사는 앞선 사례와는 다르게 그때그때 설명하기만 ‘급급’했다. 올해 초 발생한 사건과 차원이 다른 사건에도 말이다. 당시에는 유심 대란 외에 실질적인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일부 고객들의 금전적인 피해가 발생했다. 단순하게 유심을 교체하는 것에 끝나지 않고, 해당 통신사를 이용하는 고객들이 자신의 명세서까지 꺼내서 확인해야 되는 사건이다. 만약 명세서에 내가 사용하지 않은 소액결제가 명시되어 있다면, 경찰에 신고까지 해야 된다.
그만큼 큰 사건이지만 아직 제대로 된 설명조차 없는 상황이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기사들은 그전의 설명마저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물론 사건 초기인 만큼 회사 측에서 수집하거나 파악할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홍보 조직에서도 이러한 문제로 설명에 어려움을 겪을 순 있다. 그렇지만, 고객의 피해가 발생하는 상황 속에서 팩트체크가 안된 기사들은 바로잡아 사회적 불안함은 덜어야 하는 것도 홍보팀의 역할이다.
물론 자기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열심히 일하는 홍보팀들이 대다수다. 소통의 최전선에서 밤낮 가리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그렇지만 일부 몰상식한 홍보인들의 행동으로 빚어지는 일련의 사태를 바라볼 경우 참 씁쓸할 수 밖에 없다. 특히나 홍보와 기자는 대등한 관계임에도, 서로가 갑이되려는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 없다.
이는 국회도 마찬가지이다. 국회의원은 국민을 대표하여 법률을 제정하고 국정을 심의하는 사람들이지만, 최근 미국에서 발생한 사건에서는 이러한 모습들을 찾아 볼 수 없었다. 한명도 아닌 300여명의 대한민국 국민이 다른 나라의 정부기관에 체포돼 손발이 쇠사슬에 묶여 이송되는 상황 속에서도 당리당략에 치중해 싸우는 모습은 마치 ‘공포영화’에 가까웠다.
특히 대한민국 국민을 구하기 위해서 미국 정부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도 이상하지 않지만, 오히려 일부 국회의원들은 우리나라 대통령의 외교참사라고 규정하는 모습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조차 되지 않았다. 물론 여야 간의 견제도 일정 부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이 미국에서 안전하게 돌아와서 그런 목소리를 내어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들의 목소리를 지지하거나 동조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수도 있다.
앞선 올해 초 칼럼에서 대한민국이 ‘아노미’ 상황에 놓였다는 비관적인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이후 대통령이 선출되었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은 ‘아노미’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다. ‘소통’과 ‘대화’가 아닌 서로의 ‘주장’만 난무하는 시대이다. 혹자는 ‘분노’가 가득찬 사회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옳고 그름이 없는 문제임에도 유튜브 댓글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으면서 지적하고 있다.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면, 정답이라도 정답이라고 표현하지 않은 사회가 되어버렸다. 감히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통’은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일례로 ‘대화경찰’ 사례를 이야기할 수 있다. 지금은 주요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10여 년 전 만해도 찾아볼 수 없었던 존재였다. 10년 전이라고 표현하면 어마어마하게 격세지감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그때도 스마트폰과 SNS가 발달했던 시대였다. 카톡을 사용했고,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했던 시대였다.
하지만 시위 현장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쇠파이프를 든 시위자와 그것을 막기 위해 방패를 든 경찰 그리고 물대포와 차벽. 취재하던 기자를 시위자로 오해하고 연행되는 경우도 있었고, 경찰의 물대포에 시위자가 사망하는 사례도 있었다. 기자를 사칭해 시위자들을 촬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2018년 대화경찰이 도입되면서 이러한 풍경들은 사라졌다. 간혹 정치적 이견이나 사회적 문제로 큰 시위가 발생도 하지만, 2015년 때처럼 시위자가 화염병을 던지거나 경찰이 물대포를 쏘는 일은 없다. 물론 ‘대화경찰’의 한계도 있지만, 시위를 평화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에는 누구도 이견은 없다.
이처럼 ‘소통’은 물리적인 충돌을 막는 완충재 같은 역할을 할 때가 많다. 특히 소통을 통해 오해가 풀어지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최근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은 쉽지만,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소통하는 것은 어려운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무언가 조언하는 것 조차 ‘라떼 이야기’라며 조롱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지만, ‘소통’만은 퇴색되지 말아야 될 가치이자 기본이다. 시대가 혼란할수록, 정보가 넘쳐날수록 소통은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나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소통을 통해 남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또 남들에게 설득당하는 상식적인 사회가 되길 바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