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체결 가상 시나리오

2009년 가을 이른 아침, 29살 먹은 김가진 낭자는 잠에서 깨어났다. 어제 선선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연인과 덕수궁 돌담길을 걸은 탓일까. 으슬으슬 감기몸살 기운이 있는 것 같다. 코를 훌쩍이며 가진 씨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 오렌지 두어개를 꺼낸 가진 씨는 이내 주스를 짜기 시작한다.

갓 짜낸 주스를 마시자 잠이 달아나는 것 같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병에 든 오렌지주스가 대세였는데, 캘리포니아 오렌지가 싼 가격에 들어오면서 대부분의 가정에서 직접 짠 신선한 주스를 마시는 게 가능해졌다. 달걀과 베이컨을 꺼내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른다. 그 전 같으면 연두부에 간장을 뿌려 먹었을 텐데, 한미 FTA 타결 이후 유전자 조작 미국콩이 무한정 밀려오면서 콩 들어간 음식 먹기는 좀 그렇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이왕 이렇게 세상이 바뀐 것, 불편하며 살기 보다는 적응해서 잘 살기로 마음먹은 가진 씨는 아예 미국식 아침으로 입맛을 바꿨다. 그래도 프라이팬에 두르는 기름은 유전자 조작 문제로 꺼림칙한 미국산 콩기름이 아니라 스페인산 올리브 기름이다. 왜? 난 소중하니까.

지글지글 소리와 함께 베이컨이 익는 걸 보며 으슬으슬한 몸살이 어서 나아야 할 텐데, 하고 생각해 본다. 가진 씨는 별 도움이 안 되는 한국 의료보험과 오래 기다려야 하는 한국 병원들을 생각하자 순간 짜증이 났다. 하긴 이럴 때를 대비해 다국적 보험 회사인 PCA 보험사에 거액의 사의료보험을 가입해 두긴 했다.

매달 보험료를 낼 땐 생살을 뜯기는 것처럼 아까웠지만 이렇게 아플 땐 외국 보험처럼 든든한 게 없다. 한미 FTA가 타결되던 날,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제 공보험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며 눈물을 흘리며 기자회견장을 뛰쳐나갔다. 공의료보험만으로는 07년 여름부터 비싸진 약값을 감당할 수 없어졌으니 이제 웬만하면 사의료보험을 들거나 그럴 돈이 없으면 아프면 안 된다.

대학 병원으로 갈까 생각하다가, 이왕 병원 가는 것, 첨단 시설을 갖춘 미국계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영리 병원은 참으로 사근사근하기 이를 데 없다. 영리 병원이 생긴 건 전적으로 김종훈 수석대표가 성공적으로 한미 FTA를 타결지었기 때문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딜 브레이커'가 한 두 가지였나.

쌀 문제만 해도 민노당과 여러 시민단체에서 야단법석인 걸 달래느라 2015년부터 단계적으로 열기로 하는 등 진통 끝에 탄생한 한미 FTA였다.'뭐, 어차피 요새 세상에 누가 쌀밥을 그렇게 많이 먹는다고......'라고 가진 씨는 생각하며 마지막 베이컨 조각을 포크로 찍었다.

아침을 다 먹고 출근길에 올랐다. 차는 예쁘장한 PT크루저다. 사실 변호사 연봉으로 외제차 사는 거야 한미 FTA 아니어도 가능한 일이었지만 30% 정도 다운된 가격에 미국차들이 밀고 들어오니 아무래도 구입을 결정하기 쉬워진 건 사실이다. 아무튼 이런 시류 덕에 우리나라 자동차회사들 노조는 순식간에 꼬리를 내리고 수당도 반납한 채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강성 노조 소리가 쏙 들어갔다.

차를 몰고 회사로 향했다. 광화문에 자리잡은 로펌이 가진 씨가 다니는 회사다. 가진 씨의 로펌은 이미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몸집 불리기를 해 두었기 때문에 미국 법무법인들이 밀려들어오는 혼란한 시국에도 살아남았다. '그래, 그때 조그만 부티크 로펌에 입사했으면 어쩔 뻔 했어.' 생각해 보니 모골이 송연하다. 개인변호사들이나 작은 합동법률사무소들은 이미 다 고사 직전이다.

아침 조회를 위해 대회의실로 갔다. 그런데 대표이사님 말씀이 곧 미국로펌과 손을 잡는단다. 상당히 OTL스럽다고 가진 씨는 생각한다. 그러나 3년간 고용 보장을 해 주는 조건으로 합병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대표의 말에 가진 씨는 방긋 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급반전한다.

사실 미국로펌들이 일을 너무 많이 시켜서 그렇지 파트너가 되기엔 훨씬 좋은 구조다. 그리고 미국 회사들은 여성 차별이 없지 않은가. 아직도 사회 곳곳에 잔존하는 남존여비 사상과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유리 천장'이 사라진 듯한 기분에 가진 씨는 행복해졌다. 이게 다 FTA 덕분이다.

어느 자질구레한 민사 사건의 준비서면을 대강 만드느라 오전 시간이 다 갔다. 점심 시간에 잠시 병원에 들러 감기몸살을 해결보고 후배랑 잡은 밥약속에 가야 한다. 영리 병원이라 그런지 참으로 빠르다. 그전 같으면 불친절한 의사 얼굴 잠깐 보느라 한나절 다 보냈을 건데, 참 세상 좋아졌다. 그런데 처방전과 함께 받은 진료비청구서를 받은 가진 씨의 얼굴이 확 일그러진다. 그러나 곧 '나에겐 PCA 생명이 있으니까'라며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린다. '맛있는 스테이크 먹으러 가는데 이런 기분을 안고 가는 건 옳지 않아!'라고 가진 씨는 생각한다.

스테이크를 전문으로 파는 식당, 사람들로 북적인다. 미국 쇠고기가 제한없이 들어오면서 이런 패밀리 레스토랑도 가격이 좀 내렸다.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자니 3분쯤 후 후배가 들어온다. '아니, 저것이 하늘같은 선배를 기다리게 해?'하는 대목에 생각이 미치자 살짝 눈썹이 치켜 떠진다.

그러나 후배 성격을 아는지라 참기로 가진 씨는 생각한다. 후배는 어느 신문사에 다니는 성격 거친 아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후배는 왜 하필 스테이크 하우스냐며 짜증을 낸다. 미국산 쇠고기가 싫다며 징징거리는 후배를 보며 가진 씨는 속으로 나쁜 *이라고 욕한다. 어차피 먹을 거면서, 흥.

웰던 상태의(후배는 입맛도 촌스럽다. 미디엄이나 미디엄 레어 정도는 먹어 줘야 되는 것 아닌가?)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으며 후배는 푸념을 한다. “신문 기자 노릇, 더 이상 못 해 먹겠다”란다. “그래, 기자 생활 힘든 것 내 다 알지.”라며 아는 척을 한 가진 씨, 그러나 후배의 면박에 바로 주춤한다.

처음 한미 FTA 체결할 때만 해도 별 관심 없던 신문사들은 지난달 뉴욕타임즈가 작은 중소신문사를 앞세워 찍어내는 신문 때문에 요즈음 난리통이란다. 후배의 하소연에 가슴이 아파진 가진 씨, 저녁에 술을 사기로 한다.

점심시간이 끝나간다. 차에 올라 대법원으로 향한다. 오후에 들어갈 사건은 미국 어느 사립대학이 한국에 설립한 분교가 교육부를 상대로 이전 불허 처분 취소소송 사건이다. 일은 다 마무리되어 오늘이 바로 선고공판이다. 서울행정법원을 거쳐 고법, 대법까지 오는 동안 그 대학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욕이 다 나올 판이다.

그래도 1,2심 다 이기고(가진 씨의 로펌이 교육부를 대리했다), 이제 3심도 이변이 없는 한 승소할 것이다. 사실, 어느 지방소도시에 대학을 설립해 놓고 다짜고짜 서울 근방으로 학교를 옮기겠다고 강짜를 부리는 게 말이나 되나? 가진 씨는 신의칙 위반이라고 깔끔하게 밀어붙여 왔다.

오늘도 당연히(?) 승소다. 법원 식당에서 대충 밥을 먹고, 미국 아마존이 한국에 세운 서점으로 가서 이것저것 책을 고르다가 시간 맞춰 밖으로 나왔다. 기분 좋게 후배와의 술자리로 향한다.가진 씨는 위스키를 들이키며 후배의 푸념을 들어준다.

신문사 문 닫으면 자기는 비정규 노동자나 해야 한다며, 한미 FTA 이후 가혹해진 노동시장은 여성에게 특히 독약이라고 거의 울 듯한 목소리다.

이런 날은 위스키 정도 쏴줘야 선배 체면이 선다. 가진 씨가 대학 다닐 적엔 위스키값이 꽤나 비쌌던 것 같은데, 요새는 미국 위스키가 많이 들어와서 그런지 이런 날 부담없이 마실 수 있어 좋다.

위스키를 홀짝이던 가진 씨, 다듭하게 울리는 모토롤라 핸드폰을 집어든다. 팀장이 짜증을 내며 회사로 들어오라고 한다. 사립대학이 새롭게 '투자자 제소 운운'하며 사건을 중재재판소로 끌고 가겠다고 메일을 보냈다는 것이다. “대법원이 끝이 아닌가요?”라고 가진 씨는 멍하니 중얼거린다. 그러나 부장의 호통은 다음과 같다. “투자자 제소 도입 이후에 사실상 4심제 된 것 모르냐?”

짜증이 밀려온다. 그럼.....이번 준비서면은 중재재판소의 코쟁이 재판관들을 위해 '영문판'으로 작성해야 하는 건가, 하는 점에 생각이 미치자 가진 씨는 울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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