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저 탐험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성과중의 하나

[투데이코리아=구창환의 파워칼럼] 1698년 8월10일은 스톡홀름 시민들에게는 경사스러운 날이었다. 스웨덴왕가의 이름을 딴 거대한 군함 바사호가 드디어 출항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애국심에 불타는 흥분된 군중들이 이 항구도시에 몰려들었다.

이제 이 거대한 군함이 막 출항할 참이었다. 시각은 오후 4시였다. 해안에서 군중들이 환호성을 지르고,함대가 우뢰와 같은 예포를 발사하는 가운데, 바사호는 닻을 올리고 사뿐히 미끄러져 나갔다.

그때 갑자기 뜻밖의 대참사가 일어났다. 만(灣)에서 돌풍이 일자 배가 좌현으로 기울었다. 승무원들이 대포를 이동하여 무게를 재조정할 시간도 없이 제일 아래 갑판에 사각형으로 뚫린 포문으로 물이 마구 쏟아져 들어갔다.

이 군함은 침몰하고 근 300년이 지난 뒤에야 한 끈질긴 청년에 의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해저 탐험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성과중의 하나로 꼽히는데, 처음에는 별것이 아닌 듯이 보였던 두 개의 실마리가 배를 찾아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첫번째 실마리는 배를 갉아먹는 길이 30cm쯤 되는 연체동물인 좀조개였다. 이 좀조개는 인류가 처음으로 바다에 나간 이래 목조선을 갉아먹는 벌레이다. 1930년대 후반, 당시 겨우 20세였던 안데르스 프란젠은 스웨덴의 서해안을 항해하다가 좀조개에 많이 갉아 먹힌 난파선 조각이 떠있는것을 발견했다.

프란젠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발트해의 항해에 익숙한 그로서도 나무가 벌레에 의해 그렇게 심하게 갉아먹힌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 발트해는 염분이 많지 않아 좀조개가 많이 번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그는 발트해에 침몰한 바사호가 아직 그대로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리했다. 옛 침몰선의 인양을 꿈꾸어 오던 프란젠은 1차세계 대전후 바사호와 그 배가 침몰한 위치에 관한 가능한 모든 정보를 수집했다.

그는 갈구리와 드랙 와이어(견인철선)로 항구 밑바닥을 쓸어 보았으나 낡은 침대틀과 갖가지 쓰레기만을 건져냈을 뿐이었다. 4년 동안 그가 노리는 목표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4년 동안 그 목표물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를 그의 목표로 인도해 줄 두번째 실마리가 그의 손에 들어왔다. 1956년 어느 날, 항구 밑바닥을 조사 하던 중 해저의 샘플을 집어 올리는 장치인 코어 샘플러에 뭔가 단단한 것이 부딪쳤다. 끌어올려 보았더니 거멓게 변한 아주 오래된 오크나무 조각이었다.

프란젠은 이 수역 바다에서 오크가 거멓게 되려면 100년은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자기가 오래된 배를 발견한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배가 바사호가 아닐까? 그의 예감이 적중했다.

해군 잠수부가 33m 바다 밑까지 내려가 보았더니 바사호가 5m의 진흙에 흘수선 까지 묻힌 채 박혀 있었다.
인양작업의 첫 단계는 부선에서 내려뜨린 강철 케이블을 침몰선 밑으로 통과시킨 다음, 부선을 올렸다 내렸다 함으로써 침몰선을 진흙에서 끌어내어 더 얕은 쪽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이 작업이 2년 걸렸다. 그 다음에 잠수부들이 내려가 모든 포문을 닫고 물이 새어들 만한 데를 모두 틀어막은 다음, 드디어 1961년 4월 31일 케이블, 팽창시켜 부력을 조절할 수 있는 부선, 그리고 수압식 재크등의 장비를 동원하여 바사호를 끌어올렸다.

오늘날 바사호는 스톡홀름에 특별히 지은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 인양은 수중 탐색과 인양 작업의 일대 승리라 할 수 있었다. 그 공의 일부는 좀조개라는 파괴적인 작은 생물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좀조개도 무시하지 않았던 프란젠의 관찰력과 집중력이다. 당신은 무엇을 관찰하고 집중을 하고 있는가?

파워칼럼 구창환 저자 :

인맥경영연구원 원장( http://www.ceoparty.org)파워비즈니스네트워크 대표 (http://www.koocc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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