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지 않은 자장면 먹고 꽃놀이,옷구경 어때요?

14일(토요일) 오후, 유치원교사 A양은 다이어리를 들여다 보며 한숨을 짓고 있다. 원장 선생님, 원감 선생님의 눈치를 보던 직장생활을 잠시 잊고 아이들과 놀아주느라 뻐근한 팔다리도 쉬게 해 줄 황금같은 주말이건만 스케쥴이 텅텅 비어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번 토요일은 4월 14일 '블랙데이'다. 솔로는 자장면을 꼭 먹어줘야 한다는 우울한 날. A양도 사실 얼마 전부터 가끔 만나는 남자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직 둘 사이를 진지하게 의논해 본 적이 없어 A양은 오늘 과연 자신이 자장면을 안 먹어도 되는지 아니면 먹어야 하는지 헛갈린다. 거기에 어느 신문사에 다니는 이 사람은 지난 3월부터는 '한미 FTA 특집 기사'를 써야 한다며 얼굴도 잘 안 보여준다.

A양은 검디검은 자장면을 동네 중국집에서 배달시켜 먹어야 하는 자기 신세가 문득 서러워진다. 과연 A양은 블랙데이를 어떻게 보내야 조금이나마 즐거울 수 있을까?

◆자장면은 검다는 편견을 버려

'이런 기분을 안고 주말을 보내는 건 옳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A양. 그래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신촌으로 향한다. 3번 출구로 나와 연세대학교 쪽으로 쭉 올라간다. 새마을금고와 할리스커피전문점 사이 골목에 숨은 '복성각'에 가기 위해서다.

'노랑자장'(3000원),'빨강자장', '납짝자장'(3500원),'고추자장'(3500원) 등 특이한 이름의 자장들이 메뉴판을 차지하고 있다.

까만 자장면 대신 노란 빛깔의 자장면을 먹고 있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 같다. 대학 앞이라 젊은 학생들 감각에 맞게 꾸몄는지, 가게 인테리어도 A양의 마음에 들었다.

◆이대 들러서 꽃구경하고 옷가게 들러 쇼핑

노란 빛깔의 자장면을 다 먹은 A양은 가게를 나와 이대방면으로 뻗은 신촌명물거리를 걷는다. 흐린 오후 날씨, 슬슬 산책하기엔 덥지 않아 좋다.

명물거리 중간쯤에 자리잡은 '메가박스' 극장을 보자 영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A양. 그래서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꺼내 신문기자 모 씨에게 (자존심 상하지만) 전화를 걸어 본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기사를 써야 한다는 쌀쌀맞은 답변뿐. FTA 협상도 타결됐다던데 왜 혼자 계속 바쁜 척 하는지 A양은 이해가 안 간다.

다시 걷는 A양. 이대 앞에 오밀조밀 자리잡은 옷가게들을 기웃거리며 아이쇼핑(윈도우쇼핑)을 한다. 봄옷이 제법 예쁘다. 유치원에서 이번 달 말에 놀이동산 소풍을 간다는데 마침 입고갈 옷을 좀 골라야겠다고 생각한다.

옷이 든 비닐봉투 몇 개를 들고 이화여대에 들른 A양. 이대 캠퍼스의 봄꽃 구경을 하기 위해서다.

정문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체육관을 거쳐 학생회관, 중앙도서관 방향으로 걷는다. 길을 따라 하얀 꽃을 단 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이제 꽃이 조금씩 지는 때다. 떨어지는 꽃잎을 맞으며 걷는 A양. 본관 건물 앞 김활란 총장 동상 근처는 노란색과 보라색 팬지꽃으로 화단을 가꿔 놔 아기자기한 면이 있다.

◆분위기 있게 홍차 한 잔 하고 싶을 때엔

다시 정문으로 돌아 나온 A양. 좀 걸은 탓인지 목이 마르다는 생각이 들어 학교 앞 홍차전문점 '티앙팡'에 간다. 엔틱 가구를 들여놔 고색창연한 분위기의 가게다. A양은 '얼 그레이' 홍차에서 피어오르는 베르가못향을 맡으며 시사주간지를 읽는다.

영국 공주라도 된 양 우아하게 앉아 있으려니 기분이 좋긴 한데, 이러다 '주제파악 안 된 된장녀' 소리를 듣는 게 아닌가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A양은 '난 소중하니까!'라고 생각한다.

이때 울리는 휴대전화 벨소리. 아까 통화한 기자 모 씨가 주말당직이 끝났다며 신촌으로 오겠다고 한다. 그러나 역시나 된장녀 운운하며 빈정거리는 걸 잊지 않는다. 잠시 삐죽거리는 A양, 그러나 마음은 이미 무슨 영화를 볼까 극장으로 향하고 있다. 내년 블랙데이엔 자장면 대신 둘이 같이 맛있는 걸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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