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영화 '스타워즈'에서 그 기나긴 전쟁의 발단이 무엇인지 기억나십니까? '무역'입니다. 무역은 그만큼 한 국가에 있어 죽고 사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미 FTA 협상 이후 反신자유주의를 내세우는 진보진영이 특히 비판적입니다. 그들은 해서는 안 될 협상을, 그나마 불리하게 했다고 합니다. 한국 경제가 미국 경제에 전방위적으로 종속될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또한 차제에 한국 정치의 대립축이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으로 확연히 구분되기를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이 보는 보수진영은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 다수파 및 한나라당일 것이고, 진보진영은 열린우리당 소수파와 민주노동당 및 재야운동권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미 FTA로 인해 보수-진보, 신자유주의-反신자유주의, 친미-반미가 대선 정국의 뜨거운 쟁점이 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 생각엔 물론 그런 측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한미 FTA엔 그 이상의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국가전략에 대한 고민이 거기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왕 이루어진 협상이라면 이를 계기로 한국이라는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 또는 먹고 사는 문제를 진지하게 전망해보자는 게 제 주장의 핵심입니다.

국제정치경제학은 지난 130여년의 세계 경제사가 '고전적' 자유주의로부터 2차 대전 직후 '제한적' 자유주의(Embedded Liberalism)로, 그리고 80년대를 기점으로 다시 '신'자유주의로 변화해오고 있다고 시대를 구분합니다. 그 기준 역시 자유 무역이냐, 보호 무역이냐 하는 겁니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국제무역질서는 영국을 패권 국가로 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체제였습니다. 리카르도의 비교우위 이론은 어느 나라든 자유무역체제 안에 들어오기만 한다면 이익을 얻는다는 명백한 근거를 보여줬고, 국제기축통화로서 영국 파운드화의 튼튼한 기초 위에 자유무역은 꽃 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파운드화의 금 태환제가 무너지면서 고전적 자유주의 무역질서 역시 무너지게 됩니다. 그리고 각국은 경쟁적으로 보호무역주의로 돌아서게 됩니다. 굳이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아니더라도 양차 세계대전은 끊임없는 식민지 확보 경쟁과 제국주의의 길을 걸었던 유럽 열강의 중상주의적 경제정책의 필연적 결과였습니다. 자국의 시장은 닫아거는 대신 해외에 나가선 초과 이윤을 누릴 수 있는 시장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2차 대전 후 무역질서는 중상주의적 보호무역체제를 반성하면서 브레튼 우즈 협정을 기점으로 고정환율제로의 복귀와 함께 다자주의 및 최혜국대우 조항을 핵심으로 하는 GATT체제로 귀착되었습니다.
요컨대 자유무역체제를 설립하되, 서로 건드려서는 안 될 최소한의 영역을 인정키로 한 것입니다. 예컨대 농업이나 고용 유발 효과가 큰 섬유업, 시장 실패의 리스크가 높은 금융업 등이 그것입니다. 여하튼 전후의 자유무역체제는 보호무역이라는 전쟁의 원인을 제거하는 동시에 국내적 차원에서의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려 했던 제한적 자유주의 체제였습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들어오면서 신자유주의는 이 제한된 영역마저 깨자는 겁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더 이상 제한적 자유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기둥 노릇을 못하겠다는 겁니다. 쌍둥이 적자 때문입니다. 엄청난 달러화의 유출에 따른 재정적자에 사상 최대의 무역수지 적자 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우선 나부터 살고 봐야 겠다는 얘기입니다. 그게 신자유주의로의 선회 배경입니다.

따라서 한국과 미국 간의 FTA는 분명히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적 흐름에 더 깊이 편입되는 과정이 분명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지금 이른바 진보진영에서 극렬하게 반대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제가 현대사가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의 두 축 위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를 길게 나열한 것은 이것이 (적어도 당분간은) 거스르기 힘든 역사의 추세라는 점을 정확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거스를 수 없는 추세 속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무엇인가 하는 게 문제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라고 할 때 저는 두 가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우선 여기서 우리란 건, 소위 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출발해 집권까지 하게 된 정치 세력으로서의 우리를 의미하고자 합니다. 당연히 진보나 반미, 신자유주의가 뭔지 잘 압니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처절하게 깨달은 게 있습니다. 정권의 정당성을 결코 민주화나 탈권위주의로만으로 내세울 수 없으며 나아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국민들에게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 넓지 않은 국토에 부존하는 천연자원 역시 풍부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넉넉한 건 인구이고, 다행히 인구의 평균적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이 유일한 우리의 강점입니다. 또한 우리는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입니다. 당연히 안보문제가 존재합니다. 막대한 군사비의 지출과 징병제는 우리 국가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비용 측면으로 작용합니다. 모든 이들이 인정하다시피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민주주의의 희생 위에 일정한 경제 성장을 성취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경제 성장 위에 민주주의까지 이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객관적 조건 위에서 정권을 담당한 주체로서 '우리'가 부딪친 가장 큰 고민이 바로 앞으로 이 나라를 어떻게 먹여 살릴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국가발전전략의 문제입니다.

저는 그동안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이 문제에 관한 답을 나름대로 구하고자 했습니다. 이른바 한국적 제3의 길이라든가, 사회적 투자 국가, 또는 신통상국가+복지국가 등이 그동안 제가 들었던 모델들입니다. 그리고 그 논의들이 결국엔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한국 국가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어디로부터 구할 것인가로 귀착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바로 이 새로운 성장 동력을 한미 FTA를 계기로 창출해보자는 것입니다. 물론 한미 FTA 그 자체가 우리에게 해답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미 FTA가 새로운 성장 동력을 개발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요즘 TV 인기 프로그램에 '무한 도전'이란 게 있습니다. 바로 한미 FTA야말로 우리에겐 무한도전입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이나 열린우리당은 좌파정권이라거나, 운동권 정당이라 매도라면 매도당했던 정치세력입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해선 부정적이고 미국에 대해선 일정한 경계심을, 그리고 진보에 대해 일종의 신념 비슷한 걸 가진 우리입니다. 종로통을 가득 메우고 분노하는 FTA 반대 시위대나 검게 타들어가는 얼굴로 울부짖는 농민들을 보면 정말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러나 도전하지 않으면 댓가도 없습니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기조차 어려운 시대입니다. 결국 우리도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인데 단순히 득표 전략이나 정권 재창출만 생각했으면 이렇게 자기 지지기반을 허물어뜨릴지도 모르는 정치를 하고 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한미 FTA는 국가적 도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진보로부터 아무리 욕을 먹어도 좋습니다. 또 진보진영이 내놓는 국가전략이 마땅히 있으면 거기에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마땅한 무엇을 아직까지 내놓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젠 도그마를 벗어날 때가 된 것입니다.

물론 미국은 우리보다 강대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을 상대로 성공하면 전세계를 상대로 앞서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협정의 구체적 내용을 아직 아무도 완전히 모릅니다. 모르긴 하지만 설사 득실이 반반만 되더라도 장기적 관점에서는 통상교역을 통해 국운을 개척할 수밖에 없는 우리 처지에서는 약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과 경쟁을 하다 보면 그로부터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찾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아침에 이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기 전 창문 밖으로 막 피어나기 시작한 목련을 보았습니다. 올 봄은 유난히 을씨년스러웠습니다. 우박에 폭풍에 황사까지 모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생명은 살아 움직이고 변화하는 법입니다. 마침내 봉우리를 터뜨린 목련이 저렇게 눈부신 것은 저 생명의 힘으로 스산한 봄을 다 이겨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부겸 /열린우리당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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