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지성, 인권 보호·침해할수도...

집단지성의 힘은 개인의 인권을 보호할 수도, 침해할 수도 있다.
[투데이코리아=신영호 기자] 최근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네티즌의 극과극을 보여주는 두 사건이 발생했다.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네티즌의 두 얼굴이다.

네티즌 사이에서 패러디 될 정도로 관심의 대상이었던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카페가 전자이다.

후자는 지난 17일 온두라스에서 살인 혐의로 기소돼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한지수씨(27)를 후원했던 카페 'ONLY for 한지수'다.

가수 타블로의 학력 의혹을 제기하며 진실을 촉구했던 인터넷 카페 '타진요'는 타블로의 계속적인 해명과 증거 제시가 있었음에도 꼬리에 꼬리를 잇는 새로운 의혹들을 제기하며 세를 불려나갔다.

급기야 양측이 서로 검찰에 고발하는 사태로 비화됐고, 이 사건은 사회적 관심사로 주목받게 됐다.

검찰의 수사결과만 놓고 보면 타블로의 학력은 진실일 가능성이 크다. 국내 한 방송사도 타블로와 함께 그가 졸업했다는 대학교를 찾아가, 타진요의 주장이 거짓일 개연성이 높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사태의 먼지가 조금씩 가라 안고 있지만, 타블로가 받은 상처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다. 향후 타진요 측에 사법적 처벌이 가해진다 해도, 그가 받은 정신적 상처가 아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반면 한 씨는 지난 2008년 스킨스쿠버 자격증을 따기 위해 온두라스에 갔다가, 그곳에서 네덜란드 여성의 죽음을 목격하고, 사건현장 처리를 도왔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살인범으로 몰렸다.

한 씨의 아버지는 즉각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신원보증 요청을 현지 대사관과 외교부에 했지만 “국가가 개인을 위해 보증을 서준 경우가 없다”며 거절당했다.

아무런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국가의 외면까지 한 씨는 이국땅에 버려질 뻔했다.

하지만 동생의 무죄를 확신한 한 씨의 언니가 지난해 9월부터 인터넷을 통해 동생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에 2000여명의 후원카페 회원과 트위터리안들이 후원 바자회 등을 여는 등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노력은 지난 17일 무죄판결로 결실을 맺었다.

이쯤에서 두 사건을 복기해보면 타진요는 집단지성이라는 명분으로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의혹을 제기하는 '놀이공간'으로 인식하지 않았나 싶다.

또 특정인을 타깃으로 자신들의 불만욕구를 해소하려는 '배설의 공간'으로 인식하지 않았나 싶다.

타진요는 또 다른 사람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 교조주의에 빠진 집단주의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미꾸라지가 맑은 물을 흐리듯, 소수로 인해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변질될까 우려된다.

반면 한 씨 사건의 경우 국가의 무관심속에 네티즌들이 힘을 모아 여론을 형성하고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집단지성의 순 기능을 보여주었다. 만약이라는 것은 없지만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한 씨가 겪었을 고충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두 사건은 여론을 형성하는 새로운 집단으로 떠오른 네티즌들의 극과극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타블로 사태를 보면서 우리사회의 근본적 문제가 노출된게 아니가 싶다.

바로 '불신'의 문제다. 검찰까지 나서서 타블로의 진실을 밝혀냈으나, 아직까지도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소수의 네티즌들이 있다. '포스트 타진요'의 등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는 타블로의 말처럼 우리 사회의 신뢰는 바닥에 떨어졌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뢰는 사회적 자본이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돈이란 애기다. 이 사건으로 얼마만큼의 사회적 비용이 발생했는지 되짚어봐야 한다.

쾌도난마식의 해결은 있을 수 없다. 사회적 자본, 즉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가기관의 공신력을 회복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사회적 불신은 국가기관의 불투명성이 초래한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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