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 추구 양성우 시인

한국 사회의 암흑기를 기억하는가? 70~80년대 그 때, 우리의 젊은이들은 세상을 향해 목숨을 던졌고, 영혼을 지켰다. 사회 안팎은 어지러웠고, 문단은 그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 '길에서 시를 줍다'를 발표한 양성우 시인
문학을 하는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사회를 향해 쓴 목소리를 던졌고, 그 중에는 삶까지 던진 사람도 여럿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양성우 시인이 있었다.

많은 사람은 양성우 시인을 김지하와 함께 필화사건의 중심으로 기억한다. 혹자는 정치계에 입문했던 시인이라고 기억할지 모른다. 하지만 직접 만나 본 양성우 시인은 시 쓰는 사람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순도 100%의 '시인'이었다.

◆시는 내 운명, 시에 목숨 걸었죠.

'겨울 공화국',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등의 저항 시로 양성우 시인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서정성이 물씬 뿜어져 나오는 이번 그의 시집에 당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서정을 시의 바탕으로 여겼고 서정을 배제한 시를 쓴 적은 없다고 말한다.

“시를 쓰기 시작한 처음부터 서정은 문학의 기저였어요. 그러던 와중에 독재화의 싸움 과정에 있게 됐고 저항시를 쓰게 됐어요. 그것은 '시인의 사명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온 것 이죠” 폭압적인 독재 사회에서 맞설 수밖에 없었다는 양성우 시인. 그래서 그는 시를 무기로 삼고 목숨을 걸었다.

타협하지 않고 세상과 맞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양성우 시인은 “그 때,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잘못된 것을 바꾸자는 생각은 젊은이와 시인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죠. 그것이 그 당시 문학인의 사명이며 당위성이었어요”

양성우 시인은 시를 쓸 때마다 '시는 내게 무엇인가'를 생각한다고 한다. 즐거운 생각만은 아닐 터. 수 없이 하는 고민이지만 매번 '시 쓰는 것 자체는 내 삶'이라는 결론이 나온다며 양성우 시인은 수줍게 웃었다.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을 '운명'이라고 하잖아요. 시는 제게 '운명'이에요.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게 바로 시죠” 항쟁운동과 저항 시를 쓰다가 수감생활을 한 것이 여러 번이고 말도 못할 고초를 당했지만, 그는 감옥에서도 시를 썼다. “결국 시를 못 버리겠더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지난 세월이 읽혀졌다.

◆시는 내 삶의 기록, 시와 함께 한 삶

양성우 시인의 삶은 시로써 시작됐고 시로 채워지고 있다. 그의 삶의 모든 모습은 시로 기록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겪은 사건 대부분은 '시'로 인해 발생했다.

시를 쓰는 교사를 천직으로 알았다는 그의 열정은 교사재직 당시 학생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됐다. 그는 유신체제가 절정이었던 그 때 겨울 공화국'을 발표했다. 그리고 파직 당했다. 사회운동을 이유로 교사가 파직된 것은 처음이었고, 시인과 학생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이것이 '겨울 공화국 사건'이다.

강한 사회 비판을 담은 시 '노예수첩'을 발표해 또 다시 체포당한 '노예수첩 사건'을 거쳐, 그가 수감 중에 동료 문인들이 '겨울 공화국'을 시집으로 만들어 관계자들 100여 명 모두가 체포 당한 '겨울 공화국 시집 사건', 수감 중에도 몰래 시를 써 발표한 '북치는 앉은뱅이'로 고초를 당했던 것 등 그의 삶은 시로써 설명된다.

이런 그의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삶은 '가시밭길'이었다. 치열한 삶 속에서 그를 지탱했던 것은 '시적 정신'과 '사명의식'이었다. 문학을 안했더라면 세상을 바꾸는 운동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양성우 시인. 시인이었기 때문에 세상을 바꾸는 운동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절박하고 극한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시에서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의 고통의 젊은 시절이 그의 시를 만들었고 그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제 삶이 치열했기 때문에 더더욱 시를 포기할 수 없었어요. 오히려 더 열심히 시를 써야겠다고 다짐했죠. 그들이 그렇게 나를 억압한다고 해서 내가 포기하면 그들이 이기는 거잖아요. 그래서 감옥에 있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시를 썼지요”

◆정치는 문학의 연속, '시인의 세계'에서 벗어난 적은 없어

양성우 시인이 정치 활동을 했던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 이를 두고 문단에서는 “시를 쓰다 정치판으로 갔네”라고 했고, 정치계에서는 “인기 얻었다고 정치에 발 디디는 것이냐”라고 말했다.

그가 정치활동을 끝내고 시를 발표하자 많은 사람들이 “시인의 세계에 돌아 온 것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들의 말대로 그는 정치를 하다가 문학의 길로 발길을 돌린 것이었을까?

“내가 정치권으로 간 것은 정치권을 의식해서가 아니에요. 뜻을 같이한 사람들과의 수많은 논의 끝에 나온 결과죠. 제가 사욕을 부리기 위해서 정치를 시작했다면 왜 한번으로 끝냈겠어요. 전 한번도 '시'를 포기한 적이 없어요. 전에 글로 세상에 대한 시선을 움직였으니 정치로 현실을 바꾸고 싶었던 것뿐 이었어요”

그가 정치계에 입문한 것은 '시'를 쓰는 것의 연장선상이었다. 시로 인식을 바꿀 수 있었지만 현실적인 문제에 항상 부딪혔다. 제도를 바꾸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정치계에 발을 디뎠다.

“많은 사람들이 과정을 보지 않고 결과만을 보고 평가하죠. 제가 정치인이 됐을 때도 그랬어요. 사람들은 제가 정치를 시작하면서 사회가 바라는 '시인'이라는 순수 영역의 기대감을 포기한 것을 알까요”

그와 대화하는 동안 1970년대부터 2007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 긴 세월동안 변하지 않았던 것은 '문학'에 대한 그의 생각이었다. 문학은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독자와의 소통을 중요시했다. 때문에 그의 시는 읽기 편하고 독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양성우 작가는 “초등학교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시를 쓰는 것이 쉽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시인이라면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하고 늘 신인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스런 젊은 날을 보냈지만 그는 어느 누구를 탓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시절이 자신을 담금질하는 계기가 됐다며 한껏 웃는다.

그는 정말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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