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코리아=국희도 칼럼] 농산물 정책이 어려운 것은 타임래그(time lag) 때문이다.

지난번 배추파동 때 정부가 혼쭐이 난 이유가, 배추는 공산품처럼 공장에서 뚝딱 만들어내서 수요를 맞출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농산품은 씨 뿌려 수확 때까지 수개월~1년이 걸리는 타임래그성 재화다.
결국 중국산 저질 배추 수입, 정부가 산지에서 배추 사다가 노마진으로 파는 등 우여곡절 끝에 겨우 진정이 됐다.

이런 시간지체(타임래그) 현상은 요즘의 정경유착비리 수사에서도 볼 수 있다. 아무리 검찰권 독립을 외쳐도 '살아있는 권력' 아래 자행된 사건은 제대로 된 수사가 어렵다. 여론에 밀려 수사에 착수해도 꼬리 몇 개 잘라내고, 몸통은 건들지도 못한다.

결국 권력 개입 사건에서 검찰의 독립성이란 그 권력이 사라진 후에야 작동하는 속성이 있다(바꿔 말해 검찰권 독립이란 없다는 소리다).

대검 중수부가 직접 나선 C&그룹 수사에서 회장이 구속되고, 1000억원 규모의 부정대출 혐의, 수백억대 해외 비자금 등 의혹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구(舊)여권 인사들이 좌불안석이다.

이 C&그룹이란 게 1990년 구멍가게 해운중개업체로 좌판을 벌였다가, 2000년대 초부터 법정관리 기업들을 사냥하면서 한때 계열사가 41개에 이를 정도로 급성장한 기업집단이다.

C&그룹의 초고속 성장 신화(?)는 1960년대 '수출만이 살 길'이라고 믿었던 박정희 정부가 똘똘해 보이는 몇 개 기업을 찍어서 거국적으로 밀어줬던 시절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반기업적 좌파정부'로 불릴 만큼 기업인들과 접촉하는 것에 알레르기를 느꼈던 김대중-노무현정권 때 뜬금없이 출현한 21세기형 문어발기업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불가사의한 졸부기업의 배경이 도대체 뭐야? 국민들은 당근 궁금하다.

그런 C&그룹의 금융·정·관계 커넥션 수사 도중에 구 권력 관련 인사들 이름이 꽤 거론되는 모양이다. 뒤늦게 뭣도 모르고 이 커넥션에 발 담근 현 여권 인사 몇 명도 함께.

검찰의 이번 수사에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기업 사정(司正)을 전 정권에 대한 정치보복과 야당 탄압에 이용하면 국민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는 "기업비리를 수사하다 불거져 나온 정치인 비리를 내버려둔다면 그거야말로 (검찰의)직무유기“라며 검찰 측에 힘을 실어줬다.

무엇보다 '정치보복' '야당타압'이라는 용어가 심히 시대착오적이다.
권력의 비호 아래 자행된 거액의 부정대출, 비자금 조성, 탈세 등을 수사하는 걸 '정치보복'이라고 하는 건 대체 어느 나라 국어사전의 낱말풀이인가?

'야당탄압'? 웃기지 말라. 한번도 정권을 잡아볼 기회가 없었던 DJ정권 이전의 야당이라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불과 2년 전까지 권력을 휘두르면서 10년 동안 나라를 망쳐놓은 게 구 여권이다. 그런 권력 아래 자행된 정경유착 수사에 '야당탄압'을 들이대는 게 가당키나 한 것인가.

정경유착 비리가 드러나면 여야(與野) 가리지 않고 수사하는 게 검찰의 신성한 의무다. 그래서 C&같은 졸부재벌의 탄생에 당시 힘있는 정치인-공직자가 관련됐을 거라 믿는 국민들의 의혹을 낱낱이 풀어줘야 한다.

요컨대 권력이 힘을 잃었을 때 수사가 가능한 게 권력유착 사건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시간 지체는 구미 선진국의 검찰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권력형 비리를 다룰 때마다 '정치검찰' 소리도 듣는 것도 어쩌면 검찰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검찰이 이번 수사를 정치 보복이니, 야당 탄압이니 하는 망발에 눌려서 얼버무리거나, 타협하는 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되겠다. 기왕 칼을 뺐으면 다시는 그런 헛소리가 못나오도록 야무지게 수사해서 진실을 밝혀주길 바란다.

검찰은 뒤늦게라도 구 정권이 퍼질러 놓은 권력유착 비리들을 말끔히 세탁해서 사회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줘야 한다.그것이 현재의 '살아있는 권력'이 더욱 조심하고 유착 비리에 유혹되지 않게 경고하는 의미도 될 것이다.

●타임래그: 경제 활동에 어떤 자극이 주어졌을 때, 이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기까지의 시간적 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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