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사회경제적 삶·세계적 추세 등 변화의 원동력

[투데이코리아=신영호 기자] 정당의 최종 목표는 집권이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정당은 존재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집권을 통해 정책을 실현하고 다시 선거를 통해 정당은 평가를 받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집권을 위해서는 광범한 민심의 동향을 읽어야 하는 것은 불문율. 최근 전국단위 수준에서 진행된 6.2지방선거는 좋은 자료가 된다.

당시 지방선거는 예상과는 달리 여당이 패배했는데 이는 세대 변수와 정책 변수의 영향이 컸다.

선관위에 따르면 35세 미만의 투표율이 50%를 넘지 않았지만, 2006년 지방선거에 비해 20대 투표율이 약 7.5%포인트 상승했고 19세의 투표율도 9.5%포인트 상승했다. (20대 후반(25~29세) 37.1%, 20대 전반(45.8%), 19세는 47.4%)

개혁적 성향의 20대 투표참여율은 기성 정치인보다는 안희정, 김두관 등 상대적으로 젊은 정치인이 당선되는데 보탬이 됐고 박빙승부를 연출한 서울시장 선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또 천안함 폭침에 따른 안보 의제가 무상급식 등 복지 의제에 가려져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진보성향의 교육감이 당선되는 결과를 맞게 했다.

이러한 결과가 한나라당으로 하여금 변화하지 않는·권위적인·기득권만 대변하는 당 이미지를 개선하지 않고서는 재집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케 했을 것이다.

안상수 대표가 "개혁적 중도보수정당으로 국민 여러분 앞에 서겠다"고 한 것도, 정두언 최고위원이 "감세는 재집권을 위한 몸부림"이라고 강조한 것도, 나경원 최고위원이 "공천권은 한나라당을 사랑하는 국민의 공천권이 돼야 한다"고 역설한 것도 지방선거에 나타난 거대한 민심을 저버리지 않고 끌어안겠다는 전략적 인식의 산물이다.

한나라당의 변화 이유는 이것 말고 또 있다. 정당은 국민의 사회경제적 삶 속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 정당이 이익단체와 다른 점은 사적 이익이 아닌 국민과 함께 호흡하며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이다. 즉 시대적 과제를 찾고 정책으로 집약해 실현하는 것이 정당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최근 정부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사회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더디지만 수출을 통한 경제회복이 가시화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외환위기 이후 악화돼 온 계층간 격차문제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저임금 근로자 비중, 5분위 배율, 지니 계수 등 각종 분배지표가 해를 거듭할수록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강신욱 연구위원에 따르면 계층 상승을 경험한 빈곤층이 1990∼1997년 43.6%에서 2003∼2008년 31.1%로 줄어든 반면 빈곤층으로 떨어진 중하층은 1990∼1997년 12%에서 2003∼2008년 17.6%로 늘어났다. '상위 계층의 부(富)가 결국에는 하위 계층으로 돌아간다'는 적하효과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해 최근 선진국의 재정긴축 및 가계부채 조정에 따른 수요감소, 중국의 긴축 전환, 원·달러 환율하락, 수출시장에서의 경쟁격화 등으로 수출 증가율이 한자리 수로 둔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격차사회가 고착화되지 않을까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국가가 개입해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거나 이탈한 사람들을 위해 사회안전망을 튼튼히 구축해야 하는 등의 시대적 과제가 성립하게 된다.

안 대표가 "70% 복지"를 외친 것을 이념적 재단을 통해 깎아내리기만 할 것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이 부분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면 앞으로의 선거에서 집권여당이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지 못하게 될 거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함께 세계적 추세라는 관점에서 한나라당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서구에서는 보수·진보 정당들이 공통적인 딜레마에 직면했다.

이념적 정체성을 선명하게 부각시켜 충성스런 지지자들을 기반으로 선거에 임할 것이냐, 아니면 좀 더 폭이 넓은 계층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보수당도 약간 좌클릭(진보 정당의 경우는 우클릭)을 할 것이냐를 두고서였다.

누구나 똑같은 표를 행사할 수 있는 보통선거권이 제도화 단계에 접어들고, 상층, 중층,하층 등 경제 발전에 따른 뚜렷한 계층화가 이러한 딜레마를 촉발시켰다.

당시 대다수 정당들은 이념적 스펙트럼을 넓게 해서 다수의 유권자들의 표심을 노리는 포괄정당(Catch-all party)으로의 변화를 시도했다. 미국의 공화· 민주당, 영국의 노동당, 독일의 사민당이 대표적인 예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정당들도 이미 이런 형태의 변화를 시도해 왔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정치적 구호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대표적이다. 양극화 문제를 보더라도 두 정부는 해결은커녕 그 의지조차 내 보이지 않았다. 여론이 악화돼고 나서야 "신경쓰겠다"는 공허한 말만 외쳤다.

두 정부의 경험을 놓고 보면 한나라당은 무엇보다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변화에 대한 유권자들의 갈망을 충족시켜 야 한다. 정치적 레토릭만으로는 더이상 유권자들이 속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앞서 열거한 대로 이제 집권을 위해서는 변하기 싫어도 변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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