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요산 칼럼] 위협 없는 나라에도 가상 적국이 있다

[투데이코리아=임요산 칼럼] 한밤중 바다 밑 잠수정에서 어뢰를 쏘아 군함을 격침하고 군사 기지 뿐 아니라 민간인 마을에 대포를 발사한 집단이 적이 아니면 누가 적일까. 적을 적이라 부르는데도 엎치락뒤치락 고민해야 하는 게 대한민국 현실이다.

국방부가 올해 국방백서에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란 표현을 사용하기로 했다. 김관진 국방장관은 인사청문회에서 국방백서에 '주적(主敵)'이란 말을 넣을지 재판단하겠다고 했는데 '주'는 빠지고 '적'만 남았다. 이를 두고 사실상 주적 표현이 부활했다는 해석은 궁색하다.

도발 멈추면 '적' 표기도 삭제할 건가

그나마도 '북한의 위협이 지속되는 한'이라는 조건이 딸렸다. 앞으로 북한이 도발을 하지 않은 해에는 국방백서에서 '적'이라는 표현을 빼야 할지, 놔 둬야할지 고민하게 됐다.

어쨌든 주적 표기가 사라진 2004년 이후 국방백서에 비하면 진일보는 했다. 그러나 연평도 도발 후 단호한 응징과 몇 배의 보복을 다짐했던 기세에 비하면 후퇴한 것은 분명하다. 처음부터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실망도 없었을 터이다.

주적이란 표현을 사용할 경우 또 다른 적을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국방부는 설명한다. 요컨대 주변국들에 '대한민국의 적은 북한 외에 없다'는 메시지를 담았다는 것이다.

위협 없는 나라에도 가상 적국이 있다

그러나 설령 전쟁 위협이 없더라도 군사적 관점에서 적을 상정하는게 국가의 상식이다. 여러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의 경우는 그 모든 나라를 가상 적국이나 잠재 적국으로 보고 대비를 하고 있다.

중국은 대만과 대만을 지원하는 미국을 군사적 위협으로 공언하고 있다. 일본과 러시아는 잠재 적국이다.

일본 방위백서는 미사일로 일본 영토를 타격할 수 있는 북한을 가상 적국으로 명기하고 있고 국민들도 북한의 도발을 두려워한다. 자위대의 전차부대는 홋카이도 평원지대에서 소련전차 부대와의 대결을 상정하고 훈련을 한다. 중국에 대해서는 잠수함의 영해 침범에 특히 민감하다.

북한은 오랫동안 미제를 '원쑤'라고 하더니 2006년 8월 내각기관지 민주조선에서 “역사와 오늘의 현실은 조선민족 최대의 주적은 일본임을 실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수교교섭까지 오가던 일본과의 관계가 납치 일본인 문제로 결렬된 데 대한 분풀이다. 연평도 포격 후에는 북한TV에 병사들이 나와 만세를 부르며 승리를 축하했다고 한다.

북한은 핵위협까지 하며 적개심 표출

대개의 나라는 적국이 누구냐를 놓고 고민하지 않는다. 엄연히 존재하는 안보 현실을 정부와 국민 모두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다르다. 2004년 노무현 정권이 국방백서에서 '주적' 두 글자를 삭제하면서 엄청난 의미를 부여했듯 주적이 누구냐는 문제는 조선 성리학의 이기(理氣) 논쟁에 비교될 만한 철학적 문제가 되어버렸다.

껍데기만 남은 성리학에서는 형식이 실질보다 중요했다. 지금 우리나라 좌파들의 사고가 딱 이 모양이다. 주적과 내통하는 내부의 적들과의 싸움을 위해서도 주적은 주적이라 불러야 한다.

민주당이 주장하듯 주적을 명기하는 게 통일정책과 남북관계의 입지를 좁히느냐면 결코 그렇지 않다. 국방백서에 '주적'이 사용된 것은 1994년 북한의 서울 불바다 발언 때문인데 '주적' 표기가 살아있던 2000년에 남북정상회담이 잘만 열렸다.

주적 표기가 남북대화와 교류협력을 방해한다는 야당 주장은 억지다. 주적을 적으로 깎아주었다고 해서 고마워할 북한이 아니다. 어느 경우건 북한 정권이 핵 위협까지 들먹이며 우리에게 살의를 품고 있는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주적 표기 논란은 현대판 성리학 논쟁

주적이 적으로 격하된 것은 앞으로 남북관계를 고려할 때 부담이 될까 우려하기 때문이라는 게 정부 쪽 이야기다. 정부는 아직도 남북정상회담에 미련을 두고 있거나 6자회담 재개를 고려하고 있는가.

국가안보전략연구소는 2012년에 북한이 서해5도를 직접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정수리에 찬물을 끼얹어가며 '주적'의 침략에 대비해도 부족할 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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