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무산 허회태 작가>
시는 말하는 그림이요, 그림은 말없는 시라 할 때 서예는 무엇인가?

서예(書藝)는 흔히들 묶음으로 얘기하는 시서화(詩書畵)의 가운데 자리한다. 서예는 그림이면서 시(詩)고, 시이면서 그림이다. 그래서 두 영역의 사이에 서서 시와 그림을 이어주는 매개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시(詩)는 서(書)로서 빛나고,그때 비로소 화(畵)가 된다. 서예(書藝)는 말하는 시요, 말하는 그림이다. 서예를 하는 예인이 서예가에 그치지 않고 시인이며 동시에 화가일 때, 더욱 자기의 작품세계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무릇 문학과 미술과 음악 이런 대부분의 예술이 그렇듯이 서예 역시 작품 속에는 장인(匠人)의 혼과 삶의 역정이 묻어있게 마련이다.

시는 천가지 언어로, 그림은 천가지 색으로, 음악은 천가지 현으로 그 무한한 표현의 도구를 가지고 있지만, 서예는 오직 먹의 농담(濃淡)이 있을 뿐이다. 일점 일획, 먹의 윤갈(潤渴)과 선의 굵기와 붓의 강약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 아무런 화려함은 없다. 한없이 단순하다.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에는 천가지 말과 색과 음을 능가하는 무궁함이 있다. 나는 오히려 그 단순함 속에서 만가지 말과 색과 음을 발견한다.

텅빈 서실(書室)에 혼자 앉아 먹을 갈고 종이 위에 붓을 들기 전, 시경의 문장을 묵상(默想)할 때, 서예가는 비로소 자유인이 된다. 그때 오직 검정의 먹물은 진달래의 연분홍이 되기도 하고, 여름의 모란과 가을 국화와 겨울 동백의 화려한 색감을 얻으며 시의 평면적 언어를 그림의 감각적 세계로 끌어올릴 수 있다.

▲꽃이 머무는 온 세상에

그것이 서예이고 나의 작품은 그렇게 시작된다.

한 사람의 서예가는 오랜 세월 각고의 노력 끝에 태어난다. 대부분 서예에 초발심(初發心)하는 사람들은 선현(先賢)들이 남긴 육필서책을 통해, 또는 어떤 필법을 연마하는 과정을 통해 그 정신과 기법을 터득해 나갈 것이다.

고전에 대한 선택적 시각을 갖고 서예에 대한 사유와 독자성을 탐구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찾으려는 노력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것이며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서예를 하는 사람은 먹물이 마를 날이 없도록, 먹 냄새와 책냄새 속에서 잔뼈가 굵고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券氣)가 자연스레 몸에 배어야 하며, 그런 연마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나만의 조형언어를 추구할 수 있는 장인이 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나는 좌고우면(左顧右眄) 하지 않고 평생 오직 한길로 금맥(金脈)을 찾아가는 길이 바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숙명이라고 스스로에게 주문하곤 한다.

예술은 가슴속에 감동의 파장이 일 때 온다고 한다. 가만히 사물을 관찰하여, 그 사물로부터 어떤 감흥이 일어날 때, 그 때가 붓을 들 때라는 말이다.

▲꽃이 머무는 온 세상에

밖으로 자연의 조화를 본받고 안으로 마음의 근원에서 얻는다는 묵식심융(默識心融)의 뜻이 그 안에는 담겨있다. 서예술의 본질을 깊이 들여다보고, 거기에 어떻게 작가의 혼을 투영시키느냐에 따라 작품은 살아있는 것이 되기도 하고 죽은 것이 되기도 한다.

작가가 스스로의 작품세계를 논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자칫 자화자찬이 되기 쉽거니와, 그래서 그것은 평론가의 몫이다. 다만 나는 여기서 내가 중시하는 생각의 가치, 보편의 틀을 되새겨 보았다.

불가에 초발심(初發心)이 곧 깨달음이라는 말이 있듯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먹을 갈고 또 갈고, 화선지 위에 쓰고 또 쓰고,가만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 이상 무슨 길이 있을까 싶다는 것이 내가 늘 생각하는 서예가의 길이다.

하물며 "세상 사람들은 고작 유자서(有字書, 글자 있는 책)나 읽을 줄 알았지 무자서(無字書, 글자 없는 책)를 읽을 줄은 모르며, 유현금(有絃琴, 줄 있는 거문고)이나 뜯을 줄 알았지 무현금(無絃琴, 줄 없는 거문고)은 뜯을 줄 모른다.

그 정신을 찾으려 하지 아니하고 껍데기만 쫓아다니는데 어찌 거문고와 책의 참맛을 알 도리가 있겠는가." 라고 꾸짖는 채근담, 그리고 덧붙여 "소리를 통해 듣는 것은 소리 없는 데서 듣는 것만 같지 못하며, 모습을 즐기는 것은 모습 없는 데서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

예술이란 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는 서화담의 경구는 내게 아직 아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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