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의 질곡에는 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점이 있게 마련이다.

특히 20세기 한국은 격동기중의 격동기였다. 1905년의 을사늑약, 1910년의 한일합방, 1945년의 광복 및 분단체제 시작, 1961년 4.19혁명, 1980년 5.18광주항쟁등은 가히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분수령들이었다.

그러나 위에 열거된 것 말고도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있었으니 1987년의 6.10 민주화항쟁이 바로 그것이다.같은해 4월13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라는 국민 요구를 무시한 채 당시헌법을 고치지않겠다는 취지의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그러나 전두환 정권의 호헌조치는 되레 온나라가 "호헌 철폐 독재 타도"의 한 목소리를 내게 만든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호헌조치 수개월전에 운동권이었던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연행돼 조사받던 중 물고문으로 숨진 사건이 일어났는데 호헌조치 발표전후에 당시 군부정권은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도 안된 변명만 늘어놓으면서 시위는 더욱 확산됐다. 설상가상으로 6월9일 연세대생이었던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중상을 입는 사건까지 일어났다(이군은 같은해 7월5일 사망).

다음날인 1987년 6월10일 당시 여당이었던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위원을 간선제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던 날, 박종철 고문死 전말이 드러난데다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지면서 전국 40개 가까운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으며 이들 시위는 6월28일까지 계속 이어졌다.6월26일엔 시위대규모가 150만명을 넘어서면서 1918년 3.1운동 참가자수를 훌쩍 넘길 정도로 전국민의 저항이 들불처럼 번져갔다.

필자기억으로는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가 한국의 지도를 그려놓고 시위가 일어났던 장소를 불꽃모양으로 표시했는데 지도 전체가 불꽃으로 빼곡이 차있었다. 결국 전두환 대통령은 6.29선언을 발표,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면서 국민의 요구에 무릎꿇고 말았다.이때 도입된 대통령직선제는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으며 올해 대선도 6.10항쟁의 산물이라고 할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올해 대선 산파격이었던 6.10항쟁에 대해 최근 대학생들의 무관심은 놀라울 정도다.

고려대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가나다順) 등 4개 대학 학생들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6월 항쟁을 알고 있다'고 답한 비율은 절반도 안된 44%로 나타났다. 네오마르크스 서적까지도 탐닉했던 필자의 대학시절과 비교하면 상전벽해라고 아니할수 없다.

특히 박종철과 이한열에 대해 아는 학생은 10명중 한명꼴 밖에 안된다는 조사결과를 접하고 보면 당혹 그자체였다.

그러나 이는 학생들 탓으로 돌릴수 없다. 중고교 역사교과서에 관련내용이 짤막하게 언급돼있거나 아예 없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를 가르치는데 소홀한 국가는 똑같은 전철을 밟을수 밖에 없다. 일본의 군국주의 경향도 과거의 역사를 정확히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제로서 어느덧 6.10항쟁 20주년이 된 시점에서 한번쯤은 "가장 좋은 예언자는 과거"라는 낭만파 시인 바이런의 말이나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로 치부해버린다면 우리는 미래까지도 포기해버리는 것"이라고 한 영국 처칠수상의 말을 곱씹어 볼때다.

임경오 / 투데이코리아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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