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야구인생 시작, 농아인들의 희망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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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성보

[투데이코리아=장병문 기자] 최근 개봉한 영화 '글러브'를 보고 문득 심성보(39)가 떠올랐다.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한국 프로야구 최고 투수였던 김상남(정재영 분)이 음주폭행으로 징계를 받게 된다. 상남은 징계기간 동안 충주성심학교 청각장애 야구부 임시 코치 직을 맡게 된다. 여기까지는 심성보와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청각장애인들과 함께 제2의 야구를 시작한 상남의 모습은 심성보를 꼭 닮아있다. 심성보가 야구공을 다시 잡은 이유도 청각장애인들 덕분이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프로야구 무대에 데뷔했지만 꿈을 펼치기도 전에 그라운드를 떠나 '비운의 스타'로 불리기도 했던 심성보. 그를 만나 야구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 '비운의 스타' 심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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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보를 소개할 때면 '비운'이라는 단어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심성보는 억수로 운이 없던 선수였다. 1994년 쌍방울 레이더스는 대학 야구 최고의 타자로 꼽히던 심성보를 지명했다. 쌍방울은 재정상태가 넉넉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심성보에게 계약금 1억 6000만 원을 안기면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줬다. 야구팬들의 큰 관심을 받으며 프로무대에 뛰어 들었지만 심성보의 데뷔 첫 해는 기대 이하였다. 1995년 심성보는 타율 0.234 7홈런 31타점으로 평범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프로 적응 기간이 필요했던 것이었을까? 심성보의 다음해 타율은 0.275로 껑충 뛰었고 팀도 정규시즌 2위로 마감했다.

심성보의 성장에는 김성근(현 SK와이번스) 감독의 영향이 컸다. 심성보의 성적이 오른 해에 김성근 감독이 쌍방울 사령탑에 올랐고, 그의 전매특허인 강도 높은 훈련으로 쌍방울과 심성보는 점점 더 강해졌다. 심성보의 승승장구는 이때부터 시작했다. 1997년 타율 0.269 15홈런 73타점으로 거포 본능을 드러냈다. 이듬해에도 심성보의 활약은 계속됐다. 타율 0.269 24홈런 86타점으로 리그 정상급 타자로 우뚝 섰다. 당시 심성보와 함께 쌍방울의 타선을 이끌었던 박경완(현 SK와이번스)이 현대 유니콘스로 이적했지만 쌍방울 타선의 무게감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심성보가 존재감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심성보의 앞날은 탄탄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몸 상태가 좋아지지 않으면서 발목을 잡혔다. 당뇨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게 된 그였다. 심성보의 집안은 대대로 당뇨병을 앓아왔다. 심성보도 이 무시무시한 병마를 피해가지 못했다. 하루에 1kg씩 빠지던 몸무게가 65kg까지 줄어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수척한 그의 얼굴에서 혹독했던 당시 상황을 느낄 수 있었다. 정상적인 훈련이 어려워지자 심성보는 방황을 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IMF가 터지면서 2000년 1월 소속팀 쌍방울이 해체를 선언했다.

당시 SK 와이번스가 창단하면서 쌍방울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심성보도 자연스럽게 SK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나 병마로 지쳐있던 터라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해 심성보는 1할대 타율의 성적표를 남기고 방출됐다. 구단은 당뇨병에 걸린 선수를 안고 갈 수 없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갈 곳 잃은 심성보를 받아 준 사람은 김성근 감독이었다. 당시 LG 2군 감독을 맡고 있던 김성근 감독이 심성보를 품에 안았다. 김성근 식 교육으로 심성보가 제 기량을 찾는 듯 했다. 2001년 심성보는 타율 0.279 2홈런 34타점으로 부활을 알렸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주전경쟁에서 신인 박용택에게 밀려 설 자리를 잃었다. 2003년 삼성 라이온즈에 이적 한 후 심성보는 쓸쓸히 은퇴를 선언했다. 자신을 믿어주지 않은 구단들에게 서운함이 컸다. 그리고 다시는 야구공을 잡지 않을 것처럼 그라운드를 떠났다.

# 야구공을 다시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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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보는 야구공을 놓고 사업의 길로 뛰어 들었다. 하지만 평생 야구만 하던 사람에게 사업은 쉽지 않았다. 연이은 사업 실패로 상실감이 더욱 커졌다. 그 즈음 장애인팀 감독직을 제안 받았다. 심성보는 "충주성심학교 청각장애 야구부 졸업생들은 갈 곳이 없다. 야구를 계속하고 싶지만 이들을 받아주는 곳은 전무하다. 성심학교 출신의 한 선수가 대학에 진학했지만 일반 선수들과 섞여 야구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학교 측에서도 한 명 때문에 교육방식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야구를 하고 싶어 하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STS 반도체가 야구팀를 만들어 이들에게 일과 운동의 기회를 주었다. 또 내게는 감독직을 제안했다. 장애인들이 야구를 할 수 있는 환경에 감동을 받았고 청각장애인들의 야구 열정에 얼어붙어 있던 내 마음이 녹아 내렸다"며 야구에 닫혀있던 마음을 열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심성보는 몸이 좋지 않아 야구를 포기했고, 제자들은 불편한 몸이지만 야구를 하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전혀 다른 처지에서 만났지만 심성보와 청각장애인들은 야구로 하나가 됐다. 물론 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다. "처음에는 수화도 전혀 몰랐다. 입모양으로 말귀를 알아듣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야구를 가르치기는 어려움이 많았다"며 고충을 털어놓는 심성보였다. 이어 "그래도 야구부 출신이여서 어느 정도 기대했지만 실력은 암담했다. 콜플레이 조차 안 돼 손쉬운 아웃카운트도 잡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처음에는 화가 나서 성질도 많이 냈다"며 솔직한 이야기를 내놓았다. 그러나 심성보는 "의사소통이 안 되는 가운데 잘못했다고 화를 내면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아이들은 상대방의 표정으로만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라며 진심을 담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심성보가 청각장애인들과 두 시즌을 맞이했을 때 더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3교대로 근무하는 회사 시스템으로 인해 선수들 모두가 함께 훈련하기 어려워졌다. 훈련에 빠진 선수들은 스스로 기량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 경기가 있는 주말에도 이러한 상황이 반복됐다. 심성보는 "아이들이 운동을 마음껏 하지 못하자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다. 회사가 야구할 기회를 주고 있지만, 일을 우선으로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반면 아이들은 좀 더 자유롭게 운동을 할 수 있는 직장을 찾아 떠났다"며 농아인들과 이별하게 된 사연을 털어놨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심성보는 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고, 순수와 열정이라는 중요한 부분을 배웠다.

# '글러브'의 기적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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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보와 농아인들의 첫 만남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또 다른 만남이 찾아왔다. 2009년 농아인 선수들로 구성된 '데프콘 야구단'의 감독을 맡게 되면서 인연이 이어졌다. 30~40대의 경험 많은 선수들로 구성된 '데프콘 야구단'은 심성보와 만나면서 기량이 일취월장 성장했다. 지난해 열린 농아인 야구대회에서 데프콘에 준우승을 안긴 심성보는 "한참 멀었다"며 겸손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는 "장애를 안고 있어 보통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 경기에서 이길 수 있다. 몇년 사이 사회인 야구 붐이 일면서 팀들의 전체적인 수준도 상당히 높아졌다. 장애를 갖고 이들과 경쟁하려면 더 노력해야 한다"며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일반인들에 비해 불리한 조건이지만 '데프콘 야구단'의 승률은 7할에 가깝다. 농아인들의 야구 열정은 실력과 정비례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

아울러 심성보는 농아인 선수들의 열악한 야구 환경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농아인들 간 리그대회는 1년에 고작 4경기 정도다"라며 혀를 찼다. 이어 "장애인들이 야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턱없이 부족하다. 일회성 이벤트나 물품지원 등도 의미가 있지만 농아인들이 한 곳에 모여 기량을 겨룰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국야구연합회에 따르면 전국 초중고교 중 야구장이 있는 학교는 100개가 조금 안 된다. 여기에 사설 야구장을 포함한다고 해도 300개 정도다. 사회인 야구팀은 1만 개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그렇다면 평균 17대 1의 경쟁을 뚫어야 야구장에서 경기를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도 어려운 조건에서 농아인들이 설 자리는 너무나도 좁아 보인다.

심성보는 감독 말고도 또 다른 명함이 있다. 2009년 사촌형과 함께 야구연습장을 개장했다. 심성보의 이름을 넣어 '성보베이스볼센터'라고 명명한 야구 연습장은 천안시 부대동에 위치하고 있다. 대형 실내 연습장, 실외 인조 잔디 연습장 등 총 600여 평의 부지로 국내 최대규모다. 최고의 시설을 갖추었음에도 비교적 저렴한 대관료로 야구 열기에 적잖은 보탬을 주고 있다. 심성보는 "넉넉한 형편은 아니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시작한 사업이지만 꼭 성공해서 농아인들을 위한 야구장을 건립하고 싶다"라며 포부를 밝혔다.

그는 현실적으로 농아인들을 도울 방법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심성보의 두 번째 프로젝트는 야구 글러브 사업이다. 지난해 말 출시된 심성보의 글러브는 자신의 성을 따 '沈 글러브'라고 이름을 지었다. 심성보는 "글러브 판매 수익의 일부분을 적립해 농아인들을 위해 사용할 예정이다"라며 물질적인 지원에도 발 벗고 나섰다. 심성보의 '沈 글러브'는 경식용으로 제작되어 1등급에서 3등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심성보가 직접 글러브의 각을 잡아주는 서비스(?)도 제공된다. 출시한 지 얼마되지 않아 알려지지 않았지만 품질은 국내 오더 글러브와 비교했을 때 손색이 없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심성보에게 당뇨병이 없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올해로 서른아홉인 심성보는 "아마 1년 뒤 은퇴를 거론하는 노장 선수였을 것이다"라며 웃으며 말했다. 9년간 프로 선수로 뛰면서 그가 누릴 수 있었던 시간은 4년 뿐이었다. 심성보의 기록은 정상급 타자들의 3할 타율, 30홈런, 100타점에 비교하면 대단하지 않다. 그렇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쌍방울의 '최고의 타자'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심성보의 프로야구 시절은 아쉽게 비극으로 막을 내렸지만 다시 시작한 제2의 야구인생은 감동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마치 영화 '글러브'처럼 말이다. 야구를 통해 봉사의 기쁨을 깨달은 심성보. 그가 자신의 꿈과 함께 '글러브'의 기적을 조금씩 이뤄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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