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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아 자서전 <4001> 출간 후 2주가 지났다. 그쯤이면 대중의 호기심이 사라졌을 법하건만 외려 화제가 증폭되고 있다. 처음에는 정운찬 전 총리와의 남녀지사가 초점이었지만 요즘은 신씨 외할머니가 누구인지를 놓고 추측 만발이다.

신정아 자서전을 단번에 베스트셀러로 만든 폭발적 관심을 관음증으로 매도하는 언론과 명사들이 있다. 신정아 스캔들이 터진 2007년에는 자신들도 관음증을 만끽해 놓고 이제 와서 도덕군자인 척 하고 있다.

신씨에 대한 일방적 폭력을 지켜봐야 했던 일반 국민들로서는 신씨의 육성에도 한번쯤 귀 기울여 보는 게 공정하지 않을까. 그래서 필자는 책이 나오자마자 사서 보았다.

그렇다고 신씨를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내용의 진위를 가리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신 글 속에 감춰진 부호에 대한 이야기다. 이를 ‘신정아 코드’라고 이름 부치자.

신정아 자서전은 대한민국 상류사회의 은밀한 풍경화다. 등장인물들의 파노라마는 어떤 드라마보다도 화려하다. 대통령, 전직 장관, 청와대 고위층, 대학 총장과 교수들, 국회의원, 나중에 국회의원이 된 유력 일간지 기자, 명품족, 재벌, 미술관 관장, 고위직 승려, 전직 영부인일거라는 소문이 도는 할머니까지.

그러나 여기에서 그친다면 신씨가 겪은 현실처럼 가짜와 치정이 얽히고설킨 막장 드라마일 뿐이다. 어떤 이야기가 오래 기억되려면 비극의 요소가 필요하다. 학맥 인맥으로 엮인 상류사회의 담을 넘으려다 추락한 여주인공이라면 비극에 잘 어울린다.

정운찬과 만남이 파멸의 시작


파국은 정운찬 서울대 총장과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두 사람은 2005년 초여름에 처음 만났다. 정 총장은 신씨에게 서울대 교수직과 미술관장직을 제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씨는 정 총장이 처음부터 자신을 일 때문에 만나는 것 같지 않았다고 했다.

2007년 신정아 사건이 터지자 정 총장은 언론에 ‘신정아를 만난 적은 있으나 자리를 제의한 일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씨 책의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고 그 후의 사실들과 부합한다.

이름뿐이던 서울대미술관은 2005년 새 건물을 완공해 이듬해 개관했다. 정 총장이 미술관장을 물색하던 시기에 두 사람은 만났다. 신씨가 가짜 예일대 박사학위를 취득한 직후였다.

신씨가 서울대 교수직을 고사한 것은 정 총장의 제의가 겉돌기만 하고 진전이 없어 실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정 총장의 진심은 본인이 잘 알 터이다. (신씨 말로는 논문 대필로 취득한) 예일대 박사가 서울대 교수사회에서 통용될지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을 것이다.

서울대 미술관장 때문에 불똥 튀어

그런데 이 일이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고 서울대 교수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책에 따르면 정 총장은 교수직을 거절한 신씨에게 면박을 주면서 그러면 미술관장에 누가 적임인지 의견을 물었다. 신씨는 미술대 동양화과 정형민 교수를 추천했고 그대로 됐다.

서울대 박물관장인 김영나 인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현 국립중앙박물관장)도 후보로 거론됐지만 정 총장은 진취적인 인물을 원한다며 탐탁치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신씨는 이 일로 김 교수의 미움을 사게 돼 학위 문제가 불거졌을 때 김 교수는 예일대에 메일을 보내고 언론사 여기저기에 전화를 돌렸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김 교수와 같은 과에는 예일대에서 2004년 중국 청나라 회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딴 장진성 교수가 있었다. 예일대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딴 국내 인사는 장 교수와 김홍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두 사람뿐이다.

자서전에는 신정아가 자신의 논문을 대필해주었다는 미국 여성 트레이시와 뉴욕에서 만나는 대목이 나온다. 트레이시는 그 해(2007년) 봄부터 서울대 장진성 교수가 예일대에 신정아에 대해 캐고 다녔다고 말했다. 트레이시는 중국미술사 전공인 장 교수가 왜 서양미술사 전공인 신정아를 캐고 다니느냐고 물었다.

편법 쓰다 학력사회 높은 벽 충돌

인맥 학맥으로 짜인 한국 상류사회에서 예일대 출신이라면 동문들의 검증을 받게 마련이다. 예일대가 어떤 곳인가. 조지 부시와 클린턴 부부가 나온, 하버드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대학 아닌가.

신씨는 예일대 출신 박성용 명예회장의 여동생이 관장으로 있는 금호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일할 적에도 의심을 받았으나 예일대에 조회한 결과 재학 사실이 확인돼 신임이 더 두터워졌다고 주장했다.

신정아가 만약 실제로 학부를 다닌 캔자스대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논문 대필’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거나 설령 학위 위조 또는 학위 사기와 관련된 방법으로 얻은 박사를 내세웠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설령 학위 문제가 발각되더라도 지금과 같은 대파국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학력을 부풀린 다른 많은 여류 명사들처럼 얼마 뒤에는 재기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어쩌면 또는 동국대 교수로 남아있거나, 아니더라도 최소한 유능한 큐레이터로서 기자들과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한국사회의 유명인사 반열에 올라있을 것이다.

신씨는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붙이고 하늘 높이 올라간 이카로스였다. 예일대는 신씨에게 뜨거운 태양이었고 태양열은 겁 없이 접근한 신씨의 밀랍날개를 녹여 바다로 떨어뜨렸다.

인과법칙 돌고돌아 정운찬 강타

신정아 학위에 대한 의혹은 서울대에서 싹이 텄고 그 계기가 된 것은 정운찬과 신정아의 만남이었다. 신씨는 본의는 아니었으나 파멸로 이어지는 고리 역할을 한 정운찬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신씨 자서전으로 인해 학자로서, 대권 잠룡으로서 정 전 총리의 생명은 사실상 끝났다고 봐야 할 것이니 여자의 복수는 이렇게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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