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기념행사 이어져...다음달 1일까지 축제도 진행돼

윤봉길.jpg
▲사진=(사)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투데이코리아=박대웅 기자] 을사조약 등 일본의 제국주의 망령이 가득하던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의 가난한 농가에서 훗날 항일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우렁찬 목소리의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바로 매헌 윤봉길이다.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매헌 윤봉길은 11세의 나이에 일제 식민교육을 배척하고 학교를 자퇴, 사설서당인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이어 1928년 부흥야학원을 설립, 농민의 자녀들을 교육시켰고 1929년 월진회를 조직해 농민계몽운동과 농촌부흥운동, 독서회 운동을 전개하는 등 농민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매헌은 '농민독본'을 편찬해 농촌청년들에게 농민의 단결과 민족정신 배양, 애국사상 고취에 앞장섰다. 그러다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중국으로 망명해 김구 선생이 이끌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거사를 준비했다.

지금으로부터 79년전인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일제는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전승경축식을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거행했다. 이날 행사에는 일제의 상해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등 일본군수뇌부들이 대거 참석했다.

윤 의사는 이날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단상으로 던졌다. 윤 의사의 의거에 시라카와 대장과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 2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과 9사단장 등 군수뇌부 10여명이 크게 다쳤다.

의거 직후 자결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한 윤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됐다. 당초 일본군은 윤 의사를 홍커우 공원에서 공개처형하려 했으나 자칫 국제적인 영웅으로 부상할 것을 우려해 일본으로 압송했다. 이후 같은해 11월 18일 오오사카 육군 위수 형무소에 수감됐다.

이어 한 달이 지난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교외에 있던 한 작업장에서 윤봉길 의사는 26발의 탄환을 맞고 순국했다. 윤 의사의 유해는 김구 선생의 요청으로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1946년 6월 30일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정부는 지난 1962년 윤 의사의 공적을 기리어 대한민국국장을 추서했다.

한편, 윤봉길 의사 의거 79주년을 맞아 국내외에서 기념행사가 열린다. 중국 상해 루신 공헌 매헌 앞에서 29일 오전 10시 기념 식이 거행되며 국내에서는 오전 11시 양재동 매헌기념관과 윤 의사의 고향인 충남 예산 충의사에서 오전 10시에 각각 치러진다. 특히 예산군 주관으로 펼쳐지는 이날 기념식에는 이재오 특임장관, 안희정 충남도지사,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 홍문표 전 국회의원, 최승우 예산군수 등이 참석한다. 또 29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매헌윤봉길문화축제가 진행된다.

저작권자 © 투데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