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일 前조선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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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변호사로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 발표한 6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수피아홀에서 안철수 원장과 박원순 변호사가 포옹하고 있다.

안철수 현상은 이해할 수 있는 측면과 문제점을 동시에 안고 있다.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란 그것이 기성정계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을 반영한다는 측면이다. 문제점이란, 그 이해할 만한 측면이 시간과 공간을 배제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범야(汎野)의 대립구도로 나타나 있는 오늘의 한국 정치지형은 일종의 구체제(舊體制)처럼 비치고 있다. 21세기 위기 증후군(症候群)과 한국적인 문제군(問題群)을 해결할 능력도, 해결하려는 용의도, 해결하는 데 필요한 감수성도 없는, 그저 낡은 기득권의 성채(城砦)처럼 찍히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좌파 뿐 아니라 상당수 우파에게서도 배척당하고 있다. 민주당은 갈수록 보편적 ‘열린 정당’ 아닌 특정한 ‘닫힌 정당’으로 굳어가고 있다. 불만으로 가득 찬 청년 세대, 이것도 저것도 싫다는 무당파 유권자, 포스트 모던(post modern, 脫近代)적인 유권자들이 이런 정계를 불신하고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만의 잔치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안철수 현상은 이런 거부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분명하고도 실재(實在)하는 현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안철수 현상은 반면에, 다분히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초현실적 성격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북한 핵(核)위협 같은 고도의 사안(事案)에 대해 안철수 현상은 과연 어떤 답안지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 그런 문제를 높은 우선순위의 문제로서 의식하고는 있나? 그리고 그런 사안도 청년 콘서트의 문화 게릴라로 대처할 수 있나?

안철수 현상은 또한 본의 아니게 이명박 현상을 닮은 구석도 있다. 이명박 현상도 “나는 정치는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념 따위는 모른다” 운운 하며, 자신은 마치 역사의 진공상태에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청와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을 불렀다.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그리고 효과 면에서는, 좌파에 겁먹어 주기로 한 사실상의 정치 행위였다.

안철수 현상 역시 탈(脫)정치, 탈(脫)이념을 풍기면서도 요즘 며칠 사이 급속히 정치화 하고 있다. 나아가선 말과 인맥(人脈)에서 특정한 이념적 친화(親和)의 티마저 엿보였다. 정치적 용어선택과 언어구사도 좀 서투르다. 이건 무얼 말하는가? 나는 정치 따위는 노(No)다고 한 당초의 초현실주의도 섣부렀고, 그러면서도 정치 따위에 불가피하게 말려들어가는 자기모순도 어설프다는 암시일 것이다.

아직은 좀 더 지켜 볼 일이다. 한나라와 민주 등 기성정계가 곤혹스러워 하는 것은 기분 좋다. 그래, 깨라, 하는 심정도 마음 한 구석 든다. 그러나 안철수 현상 같은 ‘무드(mood)의 소용돌이’란 가다 보면 가끔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마치 창세기 1장 1절이나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할 일인 양 구가하는 것은 글쎄...그러나 모든 건 겪어봐야만 아는 게 인간의 한계라면 겪어 보랄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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