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엄한 분위기의 정치 풍토서 가벼움과 놀이가 접목된 방향으로 탈바꿈

#1
15대 총선이 있는 해인 1996년 3월의 어느날. 선거 유세장에는 수천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지역 일꾼이 되려는 후보들의 공약을 듣기 위해서다. 한 후보가 비장한 표정으로 연단에 선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 마이크에 입을 댄다.

지역과 국가 발전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는가 싶더니 상대 후보를 헐뜯기 시작한다. 비방전에 말려든 그 후보도 반격한다. 세간에 떠도는 설(說)을 근거로 누가 더 못났는지 판결해 달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면서 '우리가 남이냐'며 이 지역 출신임을 강조한다. 닭똥 같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무소속 후보 차례가 왔다. 그는 말보다는 행동이 유권자들의 감성을 흔든다는 경험칙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머리칼을 가위에 맡긴다. 반응이 시원찮다고 느꼈는지 혈서도 써 본다.

#2
2010년 5월. 6.2지방선거 선거운동이 한창이다. 후보 차량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악소리가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대중가요 가사를 바꿔 홍보용으로 만들었다. 간편한 차림의 후보가 차량에서 내린 뒤 선거 운동원들과 함께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가무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그였지만 한달간 야단맞으면서 열심히 연습했다. 흥이 오르나 싶더니 지켜보던 유권자의 손목을 끈다. 그리고 뒤엉켜 본다. 얼굴 표정에 서려있는 웃음기가 떠나지 않는다.

선거 운동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키 어려운 한 후보는 고민 끝에 자전거를 개조한다. 그리고는 정책, 공약 등을 자전거 곳곳에 붙이고 유세활동을 벌인다. 그리고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올린다. 타 후보와의 차별화 전략이 유권자에게 통한 것 같다는 느낌이다.

[투데이코리아=신영호 기자] 권위적이면서 근엄했던 정치인과 이들이 만들어 온 한국 정치의 풍토가 탈바꿈하고 있다. 무거운 외피가 벗겨진 자리에 가벼움과 놀이가 접목된 정치가 들어서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가 보여주는 쇼로 극단화됐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지만 시민들의 호응도 만만치 않다.

특히 20~30대의 반응성이 40대 이상인 중·장년층에 비해 높다. 기성 제도 정치권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갖는 사람들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이들은 가벼워진 정치와 적극 호흡하는 특징을 갖는다. 그리고 이런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잘 포착하는 건 진보좌파다.

뽀로로가 민주당 서울시장 경선 후보 기호 추첨식에 등장한 까닭
손학규 대표 아이디어…천정배 "젊은층과 소통 공감하려는 당의 노력"

지난 18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서울시장 보궐선거 경선 후보 기호 추첨식. 식장에는 난데없이 어린이들의 대통령으로 불리는 뽀로로가 등장했다. 번호가 새겨진 뽀로로 인형을 뽑는 방식으로 기호를 결정키로 했기 때문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손학규 대표의 아이디어"라면서 "추첨식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고 했다. 손 대표에게 각을 세웠던 천정배 예비후보는 "발랄하고 상쾌한 캐릭터이기에 뽑을 때도 기분이 좋았다"며 "젊은층과 소통 공감하려는 민주당의 노력"이라고 평가했다.

천 예비후보도 트위터를 적극 이용한다. 천 예비후보는 최근 자신의 가슴 코 귀 목 등 신체 특정부위를 찍어 자신의 트위터에 게재했다. 그러면서 가슴은 '가슴으로 시민을 대하겠다' 엉덩이는 '잘 하면 토닥거려주고 잘못하면 채찍질 해달라' 입은 '시민의 대변자가 되겠다'는 식의 의미를 부여했다. 천 최고위원 측은 "앞으로도 신체 부위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유형의 선거운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박영선 예비후보도 최근 정치인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는 '정치 콘서트'를 갖는 등 다른 방식의 선거운동을 통해 소통 강화에 힘쓰고 있다.

SNS, 제도정치를 발가벗기다

SNS를 이용한 정치는 제도정치권보다 장외 인사들이 적극적이다. 이들은 정치 현상을 풍자하기도 하고 희화화하면서 웃음을 유발한다.

시사평론가이자 인터넷 논객인 진중권씨가 대표적이다. 진씨는 트위터가 활성화되기 전부터 각종 매체를 통해 정치를 가볍게 만드는 데 앞장서 왔다. 최근에는 나경원 한나라당 최고의원이 7년전 자위대 행사에 무슨 행사인지 모르고 갔었다고 주장한 데 대해 "우스운 변명”이라며 "차라리 이렇게 얘기하시지. '초선 때라 제가 나경원인지도 모르고 갔어요. 가보니까 제가 나경원이더라구요. 그래서 즉시 빠져나왔습니다'”라고 꼬집었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는 최근 안철수 현상을 묻는 것에 과민반응을 보인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를 '발끈해'라고 표현했다. 이에 대해 일부 네티즌이 '발끈해'가 아니라 '밝은해'라고 하면서 한동안 설전이 벌어졌었다. 트위터의 파급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사례다.

기성 정치인과 다른 아이디어 제시한 새 인물 등장
"웹2.0 시대 리더십은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당신의 말 들어줄게'"

새로운 방식의 선거운동, SNS 정치가 활발해지는 때를 같이해 새 인물의 등장도 눈에 띄고 있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박원순 변호사와 이석연 전 법제처장 등이다.

이들은 의도했던 그렇지 않던 이미 정치 리더로 주목받고 있다. 이들은 정치 불신이 누적된 상황에서 기존 제도 정치인들과는 다른 생각과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박원순 변호사는 치열한 경쟁만이 유일한 게임규칙인 선거판을 "축제의 장으로 만들겠다"고 한다. 안철수 원장을 측면에서 도운 법륜 스님은 "기존의 권력투쟁, 이권투쟁을 하는 정치방식은 그(안 원장)에게 맞지 않다"며 "만약 정치를 한다면 다른 차원의 정치, 새로운 틀의 정치여야 한다"고 했다.

문용식 민주당 유비쿼터스위원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과거의 리더십은 권위적이고 가르침을 주려고 하는 리더십이었다면 지금 웹 2.0 시대의 리더십은 대중으로부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리더십의 원천이 될 것"이라며 "핵심이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내가 당신 말을 들어줄게, 나와 이야기해볼래’하는 수평적인 소통, 이 속에서 국민과의 공감을 일으키는 능력이 리더십의 원천이 될 것"이라고 했다.

문 위원장은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미디어이고 미디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뀌게 돼 있다"며 "역사상 보면 신문이 등장하면서 여론 형성 기능을 해 대의 민주주의 제도가 꽃을 피웠고 인터넷이라는 뉴미디어가 나온 이후 지금 사회와 정치가 바뀌는 중"이라고 했다. 이어 "미디어가 바뀌면 정치 지도자가 바뀐다. 스타 정치인이 탄생하고 2012년은 SNS의 시대가 될 것"이라며 "새로운 뉴 미디어, SNS가 등장했기 때문에 여기에 가장 잘 부합하는 정치, 이를 가장 잘 활용해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정치인이 대권을 잡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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