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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코리아=임요산 칼럼] 스티브 잡스의 생부 압둘파타 존 잔달리는 2005년 잡스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여러 차례 이메일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잡스로부터 두 번의 짧은 답장만 받았을 뿐이다.

스티브 잡스와 남노당 당수 박헌영의 아들

잡스가 죽기 6주 전에 보낸 2번째 답장은 "감사합니다(Thank You)"가 전부였다. ‘건강을 빨리 회복하기 바란다’는 생부의 이메일에 대한 답장이었다. 부자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대단히 의례적 인사말이다.

아랍계인 잔달리는 미국 위스콘신대 대학원에 다닐 때 잡스의 생모 조앤 심슨을 만나 잡스를 낳았지만 심슨 집안의 결혼 반대 때문에 잡스를 다른 곳에 입양시켰다. 그는 잡스를 입양 보낸 것을 후회하며 만나서 커피라도 한잔 하기를 원했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잔단리는 만약 잡스가 유명인이 되지 않았다면 잡스에 대해 까맣게 있고 있었을 것이다. 핏줄에 대한 서양인들의 관념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무소속 서울시장 후보 박원순이 남로당 당수로 북한 부수상을 지낸 박헌영의 아들과 함께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한 것으로 밝혀졌다.
불문에 출가해 ‘원경’이란 법명을 쓰고 있는 박헌영 아들도 잡스처럼 생부의 얼굴을 보지 못하며 자랐다. 하지만 그는 잡스와 달리 아버지를 부정하지 않았다.
전설처럼 들려오는 아버지 이름을 한편으로 감추고 다른 한편으로 되새기면서 오랜 세월을 살아오다 민주화 시대를 맞아 역사문제연구소를 모태로 삼아 2004년 ‘박헌영 전집’을 펴냈다.

역사문제연구소 함께 세운 박헌영 아들과는 같은 ‘밀양 박씨’

박헌영이라면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역사의 행간으로 사라진 인물이다. 그는 남침 야욕에 몸이 단 김일성에게 전쟁이 나면 남한의 남로당 조직이 일제히 봉기할 것이라고 장단을 맞추었다.
미군의 수배령을 피해 김일성의 본거지 평양에서 불리한 권력게임을 하고 있던 박헌영으로서는 전쟁으로 한반도가 통일될 경우 열세를 만회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 터이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 연합군에 쫒겨 압록강변으로 도망간 김일성은 잉크병을 던지며 박헌영의 책임을 따졌다고 한다. 요컨대 박헌영도 동족상잔의 참화에 책임이 큰 인물이다.

역사의 평가와는 관계없이 원경 스님이 아들로서 행한 도리는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박원순과 함께 만든 역사문제연구소라는 공간은 본의 아니게 좌파 학자들의 총본산이 되고 말았다. 남민전 사건 연루자로 지금은 민족문제연구소장인 문학평론가 임헌영이 초대 부소장이 되었던 데서 연구소의 앞날을 예정된 거나 다름 없었다.


이승엽 이래 처음으로 좌파가 서울시장 되나

임헌영은 처음 소장으로 내정됐으나 아버지 박헌영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원경 스님이 남민전 관련자를 소장으로 세우는 것을 꺼려 반대했다고 한다.
박원순은 역사문제연구소의 초대 이사장을 맡아 연구소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원경 스님과 박원순 사이에 무슨 연결고리가 있나 했더니 결국은 핏줄이었다. 같은 씨족, 즉 밀양 박씨인 것이다. 언필칭 ‘진보’답지 않게 ‘씨족끼리’라니.

그런 박원순이 여론조사에서 일방적 독주를 하며 서울시장이 될 듯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여기서 박헌영의 오른팔로 후일 그와 함께 김일성에 의해 ‘미제(美帝)의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한 이승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국가보안법 폐지 촉구, 반미 촛불시위…서울시 앞날은

이승엽은 6·25 개전 초기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당시 서울시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역대 서울시장 리스트에서야 당연히 빠져 있지만 1950년 6월부터 9월까지 3개월 간 서울시장 역할을 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좌파 성향 연구소 설립을 주도하고,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며, 효선· 미선양 사건과 광우병 촛불시위 등 반미 캠페인에 앞장 선 박원순이 만약 서울시장이 된다면 이승엽 이래 처음으로 좌파가 서울시정을 장악하게 되는 셈이다. 박헌영의 심복으로 서울시를 장악했던 이승엽, 박헌영의 아들과 좌파 서울시장 후보 박원순. 역사에 뫼비우스의 띠라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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