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일 前조선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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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대(對) 김종훈의 FTA 논쟁-한국 근현대사의 압축판(版)을 보는 것 같다. 마치 대원군-수구파 대(對) 개화파-독립협회의 논쟁을 보는 것 같다면 지나친 비유일까? 그러나 어쨌든 김종훈을 향해 “이완용 같다”고 한 정동영을 TV 화면에서 지켜보자니 어쩐지 구한말의 척양(斥洋, 서양을 배척)파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후발국과 선진국, 제3세계와 서양, 아시아와 서구,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라는 대칭적 구도에서 그 양자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것은 100년을 넘도록 여전히 논쟁적 이슈로 남아 있다. 한미 FTA 비준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아마도 그 2000년대 버전(version)일 것이다.

결론부터 앞세워, 대원군-전봉준 식으로 맞서 개방론자를 이완용으로 매도하는 것으로는 2000년대 세계화 물결에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 한국 현대사의 성공 스토리 자체가 폐쇄주의를 버렸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 정반대 쪽 모델이 북한 현대사의 실패 스토리였다.

단지 남은 문제는 세계화와 개방에 부수되는 ‘치이는 사람들’의 손실을 어떻게 구제해 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예컨대 외국계 대형마트 때문에 한국 영세 상인들의 재래시장과 구멍가게가 밀려나는 것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하는 방법의 문제일 뿐이다. 그 방법은, 최소한 러다이트(rudite)적 발상이어선 안 될 것이다.

영국 산업 혁명기에 기계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근로자들이 기계를 파손한 것이 러다이트 운동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으로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막을 수 있었나? 지금의 FTA 시대에서도 마찬가지다. 김종훈을 이완용이라 치는 러다이트 수준의 발상으로는 세계화 시대의 장기적인 국가이익과 국민이익을 보장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방식 그대로, 세계화와 개방을 과감히 받아들이면서 우리의 죽기 살기 정신으로 선진적인 스마트 폰 시대와 김연아-박태환-한류 시대를 이룩하는 길밖엔 없다. 그러면서 ‘치이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별도로 구제책을 마련하는 수밖에 없다. 구제책 마련에는 모든 정파가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대륙 세(勢)냐, 해양 세(勢)냐? 이 100년 논쟁에서 대한민국의 '해양 선택'이 승리했다. (http://cafe.daum.net/aestheticism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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