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일 前조선일보 주필

선거철만 되면 세대 사이의 대결이 화제가 되곤 한다. 20~30대가 투표할 때 부모, 선생, 50대 이상한테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물론 그나름의 일리와 양심의 자유 자체는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동향 가운데는 교육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지적해 주어야 할 측면도 없을 순 없다. 그 세대의 가장 큰 위험성은 아마도 20대에 처음 안 것을 “다 알았다”고 단정하고 싶은 유혹 아닐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주인공은 죽을 때까지 수많은 깨달음의 단계를 거쳤으나 그 때마다 “이건 아닌데...” 하는 회의 (懷疑)로 번민했다. 그 번민은 새로운 깨달음을 유발했다. 이 패턴이 죽을 때까지 되풀이되었다.

<데미안>은 물론 픽션이다. 그러나 이른 나이에 나는 다 안다고 단정하지 말라는 경종으로선 훌륭하다. 20데엔 누구나 1차적 신념을 얻게 된다. “아, 인생이란, 세상이란 이런 거구나” ... 그러나 그 때부터가 정작 중요하다. 그 1차적 신념에 갇히면 안 되는 것이다.

긍정, 긍정의 부정, 부정의 부정, 새로운 긍정 그리고 그 지속적인 반복...이것이 구도(求道)의 길이다. 20대 때의 1차적 신념을 ‘시작’으로 보지 않고 ‘종착역’으로 단정하는 데에 청춘의 함정이 있다.

스승, 공부, 독서, 체험, 사고(思考) 훈련은 이 20대적 함정의 위험성을 깨닫게 해주자는 것, 즉 교육이다. 요즘 청소년들에게 이런 교육이 과연 있을까? 그 대신 ‘세뇌(洗腦)’, 선동, 프로파간다, 막장 대중연예만 흘러넘치고 있다. 공교육 현장에선 스승의 교도권을 ‘학생인권조례’로 압도하게 하려는 시도마저 있다.

3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어떤 사극에서 주인공은 “착취가 없는 세상을...” 운운한다. 그 시대에 ‘착취’라는 단어가 있었을까? 그런데도 작가와 연출자는 그런 말을 슬쩍 집어넣는다. 세뇌인 것이다. 이런 세뇌를 받은 청소년들이 “나는 다 알았다”고 단정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SNS다, 사이버 공간이다, 무어다 해서 청소년들은 스승, 공부, 독서, 사고훈련을 떠나 유행적인 휩쓸림 쪽으로 더욱 더 멀리 떠내려가고 있다.

선동가, 음모가+하이테크 통신수단+막장 대중연예가 21세기 홍위병 증후군을 확산 시키고 있는 시대-‘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소용돌이 속에서 청소년들을 부정확한 1차적 신념의 위험성으로부터 보호해 줄 방도란 정말 없는 것일까? (cafe.daum.net/aestheticism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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