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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 건설당시 집무실이던 롬멜하우스에서 안병화 전 포스코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사진 = 포스코 제공)

[투데이코리아=오만석 기자] = 철강불모지였던 대한민국에 사상 첫 일관제철소를 건설해 중화학공업 입국의 기틀을 다진 세계적인 철강왕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박태준 명예회장은 1960년대 철강불모의 이 땅에 최초의 일관제철 소를 성공적으로 건설하고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철강사로 성장 시킨 한국 철강산업의 큰 별로 꼽히는 인물이다.

철강왕이라 칭송받는 미국의 카네기는 당대 35년 동안 연산 조강 1000만t을 이루었지만, 박태준은 당대 25년(1968~1992년) 안에 연산 조강 2100만t을 달성했다. 기술력과 자본력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카네기보다 짧은 기간에 그 2배가 넘는 규모로 키워낸 것이다. 생전에 제철소를 두 곳이나 세운 인물은 박 명예회장이 유일하다.

현재 포스코는 연산 3700만t 규모의 조강생산을 기록하는 세계 4위권의 철강사로 성장했다. 최근 철강경기 하락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철강사를 제치고 시가총액과 신용등급에서 모두 수위를 기록 하고 있다.

포스코가 현재와 같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60~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가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박태준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헌신적인 리더십이 보태지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로 평가받고 있다.

1978년 중국의 최고 실력자 등소평은 일본의 기미츠제철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당시 신일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했다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느냐"라는 대답을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27년 동래군 장안면에서 태어난 박태준 명예회장은 일본에서 성장해 1945년 와세다 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해방으로 학업을 중단한 후 귀국해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6기로 졸업했다.

이때 교수로 재직 중이던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인연을 쌓았고 훗날 이 땅에 최초의 일관제철소 건설의 큰 꿈을 잉태하게 된다.

1963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후 경제인으로 변신, 1964년 대한중석 사장에 임명되어 1년 만에 대한중석을 흑자기업으로 바꿨다. 이후 박태준의 경영능력을 높게 평가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종합제철소 건설 특명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박 명예회장은 제철소 건설과정에서 고비고비마다 벌어진 난관을 특유의 결단력과 열정으로 극복하면서 세계가 부러워하는 철강신화를 일궈낸다. 제철소 건설과정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박태 준 명예회장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준다.

1967년 어렵사리 일관제철소 건설 지원을 위해 조직된 국제차관단이 IBRD의 부정적인 전망으로 와해되자 일본의 유력인사들을 일일이 설득해 대일청구권자금을 전용하도록 해 피지 못할 수도 있었던 일관제철소 건설의 꿈을 꽃피게 한 것이다.

포스코의 DNA와도 같은 '제철보국'과 '우향우 정신'은 박 명예회장이 건설초기 철강역군들을 하나로 만드는 공동의 좌우명이 됐다.

이 땅에 일관제철소를 건설해 경쟁력 있는 산업의 쌀을 안정적으로 공급, 조국의 은혜에 보답하자는 '제철보국'은 포스코의 설립 근거다. 또한 '우향우정신'은 선조의 핏값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하는 일관제철소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각오를 담고 있다. 성공하지 못할 경우 제철소 건설부지에서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몸을 던지자는 단호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박 명예회장은 공기업 체제에 따르는 비효율과 부실의 여지를 막기 위해 조직의 자율과 책임문화 정립에 특히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책임의식은 자연스럽게 완벽주의로 연결됐다.

1977년 3기 설비가 공기지연으로 고전하고 있을 때도 발전 송풍 설비 구조물 공사에서 부실이 발견되자 80% 정도 진행된 상태였지만 부실공사를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며 모두 폭파한 일은 완벽주의의 의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이다.

목욕론도 박태준 명예회장의 일면을 이해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다. 박 명예회장은 "깨끗한 몸을 유지하는 사람은 정리, 정돈, 청소의 습성이 생겨서 안전·예방의식이 높아지고 최고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며 청결한 주변관리를 주문했다. 이 때문에 제철소 건설초기부터 현장에 샤워시설을 완비했다.

또한 1983년 광양제철소 호안공사 시공 때에는 감사팀 직원들에게 스쿠버 장비를 갖추어 전문가 도움을 받아 바닷 속에서 13.6㎞ 호안의 돌을 일일이 확인해 불량시공을 점검하기도 했다.

철저한 비리근절도 박 명예회장이 한결같이 지향했던 경영철학이다.

1970년대는 설비공급사나 정치권에서 각종 납품 비리나 청탁 압력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받는 기본협약을 체결하고 포항제철 공사에 한창이었을 당시 포항제철 서울사무소에 인사청탁과 납품업자를 추천하는 전화가 폭주했다. 그 중에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박종규 청와대 실장의 청탁도 있었다.

결국 당시 박태준 사장은 정치권의 압력 배제와 함께 설비 공급업자 선정의 재량권 인수 등을 골자로 하는 내용을 메모에 적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소위 '종이마패'로 불린 이 메모는 외부압력을 차단하고 비리를 근절하는 상징처럼 전해져 온다.

미테랑 前한 프랑스 대통령은 박 명예회장에 대해 "조국이 군대를 필요로 했을 때 장교로 투신하고, 한국이 현대경제를 위해 기업인을 찾았을 때 기업인이 되고, 한국이 미래의 비전을 필요로 할 때 정치인이 되어, 한국에 봉사하고 봉사하는 삶이 끊임없는 지상명령이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평생을 한결같이 조국 발전에 헌신했던 박 명예회장은 32대 국무총리를 맡기도 했다.

박 명예회장은 일찍부터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해 1986년 포항공대(포스텍)를, 이듬해에는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을 설립해 포스코-포항공대-포항산업과학연구원 등 3개 축으로 하는 산학연 연구개발 체제를 구축했다.

이는 국내 최초의 산학연 연구개발 체제로, 산업계 전반에 걸쳐 새로운 기술개발 모델을 제시했다.

포항공대는 박태준 설립이사장과 포스코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1986년 12월 국내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을 표방하며 설립됐다.

학사운영정책, 신입생 선발 등에서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획기적인 정책들을 과감하게 추진해 국내 정상의 대학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대학으로 성장했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라는 좌우명을 일평생 지켜온 박태준 명예회장. 1960년대 제철소 건설초기부터 최근 명예회장으로 재직할 때도 단 한 주의 주식도 보유하지 않고 청정한 삶으로 보여줬다.

박 명예회장은 국무총리에서 물러난 2000년 40년간 거주하던 아현동 소재 주택을 처분해 사회에 환원하기도 했다. 이 집은 1961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 당시 의장이었던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특별 하사금'를 받아 매입한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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