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프 인사들 기업 고과 마인드 무장…서쪽 높은 지지도 큰 힘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자 미국 경제는 큰 혼란에 휩싸였다. 국민총생산은 반토막이 났고, 실업률은 25%나 됐다. 사실상 전국민이 경제 대란에 말려들어 허덕인 셈이다.

이 와중에 등장한 루즈벨트 대통령은 극약처방을 내놨다. 당시로서는 전위적인 학설이던 케인즈 이론을 흡수해 경제 부문에 대한 적극적 정부개입을 구상했다. 이른바 '뉴딜' 정책이었다.

반발도 만만찮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전례가 없다시피 한 일이었다. 당장 '위헌' 시비가 붙었다.보수적이고 원칙적인 시장경제주의에 익숙한 법관들이 장악하고 있던 연방대법원(미국 사법체제에는 헌법재판소가 따로 없고 대법원이 위헌심판을 맡는다)은 뉴딜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루즈벨트 행정부의 법률 몇 건을 위헌으로 선언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법원의 판단에 호락호락 수긍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법원 개혁법을 내놓고 여론몰이에 들어갔다.

여러가지 정교한 장치로 포장했지만, 요점은 마음에 안 드는 대법관들을 물갈이해 버리겠다는 으름장이었다. 연방대법원은 크게 당황했고, 루즈벨트 대통령과 타협을 시도했다. 이후 대법원이 뉴딜정책에 발목을 잡는 일은 없어졌다.이 시기를 기준으로 Old Court와 New Court로 구분하는 것은 이런 법원의 급격한 태도변화 때문이다.

◆압도적 여론지지 등에 업고, 당에 기업체 마인드 불어넣는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로 20일 결정됐다. 치열했던 당내 검증공방에서 어렵게 거둔, 문자 그대로 '신승(辛勝)'이었다.

21일 아침 각 언론사 지면을 장식한 '이명박의 탕평책'은 그래서 자연스러워 보였다. 검증에 시달린 뒤끝에 간신히 승기를 잡은 이명박 전 시장과 측근들이 일단 경선 승복이라는 '통 큰 결단'을 내려준 박근혜 전 당대표측에게 손을 내밀 것이라는 관측이 이구동성 나온 것이다.대선 총책임을 박근혜 전 대표가 맡아줘야 한다든지 하는 포용 정책이었다.

그러나 같은 날 오후가 되면서 기자들이 어리둥절해 할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 전 시장이 "당 개혁 드라이브를 걸겠다"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보수정당 이미지와 인맥으로 뭉친 당을 대대적으로 혁신하겠다는 구상이다.

이 전 시장 측근들도 이런 목소리에 부창부수 화답하기 시작했다. 정두언 전 서울시 부시장이 모 통신사 기자에게 '기업체 같은 개혁 드라이브' 요지의 발언을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전 시장 측근들은 자신들이 인정하는 대로, 정치적 경력은 짧다. 그러나 '사회 지도층'으로서의 이력을 합산하면 한나라당 중진들에 버금간다. 기업체 경력이나 행정 경력 등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더러 박형준 이명박 캠프 대변인이나 진수희 의원처럼 교수 경력이 있는 이도 있다.

이 전 시장측의 당개혁 구상은 이런 인적 자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업체 CEO 마인드로 무장하고 있다.

이명박 캠프는 이미 당내 경선에서부터 기업체 못지 않은 치열한 생존 경쟁으로 이름을 날렸다. 학맥으로 뭉친 여권의 모 캠프, 정책 지향으로 뭉친 여권의 또다른 캠프, 지역 인맥이 잡고 있다고 소문난 또다른 범여권 어느 캠프 등등, 지금 여의도에 자리잡고 대선을 준비하는 캠프들은 대략 '줄'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박근혜 캠프의 경우도 '사람을 잘 믿지 않지만, 대신 한 번 믿으면 끝까지 가는' 박 전 대표가 초이스한 사람들인 만큼, '친위대' 성격이 강하다. 이런 배경상 각 캠프는 내부적으로는 호형호제까지는 아니어도 끈끈한 정이 있다는 소리다.

그런 반면 이명박 캠프는 '일을 하러 모인 집단'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MB 캠프에 들어온 사람들은 처음엔 작은 일을 줘 보고 능력을 검증한 다음 발탁 여부를 결정하는 기업체 인사고과 시스템을 견뎌낸 사람들이다.

이러니 기동성이 강하고 경쟁논리가 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때로 교통정리가 필요할 정도로 일감 하나를 놓고도 경쟁이 붙기도 한다. 혹자는 융합이 안 된다고 폄하하기도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에는 강점이 있다.유연하고 실리적이다.기업체에서만이 아니라 결과가 모든 걸 보여주는 선거판,여의도에서도 이런 강점은 중대한 자산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나 '10년만에 온 정권 교체 기회'를 놓고서는 더 그렇다.

21일 오후 날아든 한나라당 대개혁 소식은 단순한 승자의 '군기 잡기'가 아니라 이명박 전 시장과 이명박 캠프가 가진 이런 속성에 기인한다는 분석이다.

한 순간 바람이나 소나기가 아니라 이명박 전 시장이 당의 다크호스, 당의 대선주자 자리에 버티고 있는 한 한나라당에 지속적으로 불어닥칠 변화라는 소리로 바꾸어 읽을 수도 있다. 날씨가 어떻다, 정도가 아니라 '기후' 자체가 바뀐 것이나 다름없다.

이 전 시장이 한나라당에 수술용 메스를 들이댈 부분은 아직 명확히 전부 드러나지는 않았다. 다만 전반적으로 당이 보수적 색채와 보수파 인맥으로 똘똘 뭉쳐 있는 분위기 자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있음은 분명하다.

일단 여러 발언들을 종합해 보면 조직이 비대하다 비효율적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웰빙 한나라당'을 수술하겠다는 이야기다.

당에도 팀제나 성과제를 중심으로 한 기업체처럼 경쟁적 요소를 도입하겠다는 이명박 전 시장의 구상은 이런 웰빙 정당으로는 영원히 불임 정당(정권을 창출하지 못하는 정당을 말하는 정가 은어)을 면할 수 없다는 위기 의식으로 보인다.

또, 요새 기업이나 관공서에서는 딱딱한 조직 구조 대신 '일'을 중심으로 이합집산, 빠르게 기동하는 '태스크 포스'가 유행이다. CEO 마인드로 무장한 이 전 시장으로서는 이런 외부의 빠른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고 있는 당이 답답하게만 보일 수 밖에 없다.

'당내 조직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여론 표로 밀고 들어온' 열악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이 전 시장이 선출 다음날부터 개혁, 수술 운운하는 데엔 이런 절박함이 있다.

이런 절박함도 어느 정도 뒷심이 받쳐주지 않으면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이 전 시장에게는 당심을 잡지 못한 대신 여론표라는 우위요소가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한나라당이 반영한 여론조사를 '허상'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단 정해진 룰에 따라 여론조사기관들이 민심동향을 체크한 것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아울러 범여권 지지층과도 대략 겹치는 지지기반을 보였다는 분석도 나온다.

또 당원 지지율을 보면 일단 동쪽은 박근혜, 서쪽은 이명박 식으로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한나라당의 전통적 지지층이 아닌 지역을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은 한나라당이 기존에 다니지 않던 길을 누비는 게 MB 쪽의 주특기라고 할 수 있다. 또 정통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아닌 외부 원군이 밀어주는 특성을 보인다. MB 캠프로서도 이미 이런 점은 파악하고 있을 터이다. 결국 당 중심세력이 반발하든 말든 (최악의 경우) 외인부대를 끌어다가 진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비상카드로 갖고 있는 유리한 고지다.

당의 대선주자로 결론난 뒤 지지율이 급등한 것도 반가운 뉴스다. 밴드 웨건 효과를 탁월하게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휘발성이 강한 부동표가 일시적으로 모인 것이라고 해도, 지지율이 모든 걸 말해 주는 방송가나 정치판에서 지지도 급상승만큼 호재는 없다.

수많은 검증거리를 대부분 이겨낸 것도 면죄부가 된다. 조금 미진한 부분은 높은 지지율로 '그만 하면 됐다'는 면죄부를 얻으면서 일단락됐다. 이 면죄부는 아울러 어떤 방향으로 일을 하든 믿어주겠다는 '신임장'이나 다름없다.

검찰 수사도 대부분 마무리 단계다. 도곡동 땅사건을 검찰 역시 대충 접고 싶어하는 눈치다. 완전히 미운 털이 박힌 국정원과는 달리 검찰은 아직은 이명박 전 시장측과 화해할 여지가 있는 편이다. 도곡동 수사를 재개하지 않는 것으로 '임기말이 가까운 정상명 총장이 이끄는 검찰'과 유야무야 악수를 한 셈이다.

요는, 이명박을 택한 많은 사람들은 당의 기본논리에 충실한 박근혜 전 대표보다 현대건설 사장 출신 이명박을 더 선호하고, 또 믿는다는 얘기다.어느 기관도 이런 이 전 시장에 태클을 걸지 않을 모양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뉴딜이라는 이상한(?) 개념을 들고 와 보수정치인들과 연방대법원을 난감하게 했던 대공황 당시와 이명박 전 시장이 기업식 개혁 운운한 생소한 접근으로 당내 정통파를 어이없게 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여러 모로 오버랩되어 보인다.

위기 일발 상황인 미국과 한나라당, 그리고 대공황에 지친 미국인들과 야당 노릇 10년에 지친 한나라당 평당원들과 경제난에 아우성인 일반인들이 닮은꼴이라는 것이다.

이 전 시장이 당권을 아직 장악하지 못한 터에 개혁 드라이브를 건 것은 이런 위기상황과 나름 든든한 지지여론에 기반한다고 볼 수 있다.

◆골수 보수파들에게 줄 약간의 당근은 무엇?

이제 계산은 대충 끝났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뉴딜을 방해하는 보수정치인, 법관들을 여론과 경제회생이라는 카드로 압박해 무너뜨렸듯, 이명박 전 시장도 자신과 코드가 맞지 않는 정치인들과 당구조를 높은 여론지지율과 정권을 찾아오겠다는 구호로 밀어붙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강한 압박카드와 압박 전략으로 밀고 나가도 이길 수는 있다는 계산이 서기는 했으나, 이 전 시장이 전적으로 채찍으로 보수정치인과 전통적 지지층을 다스릴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영남 의원이라는 코드로 대변되는 이들은 박근혜 전 대표의 실패로 그로기 상태다. 박사모로 대변되는 박 전 대표 지지층은 '경선 불복' 운운하며 대항할 태세다.

하지만 의원들에게는 18대 총선에서 어느 정도 배려를 해 주는 선에서 달래면 된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공천권을 미끼로 유혹하거나 투항시키자는 구상이다. 누군가는 공천을 안 주는 방향으로, 누군가는 협력을 대가로 다음 번 금배지를 보장하는 식으로 선별 구제하면서 굳건하게만 보이는 박근혜파 의원층을 교묘히 다스린다는 얘기다.

또 박사모에게는 정책 구상과 경제 회복이라는 청사진을 내밀어 달랜다는 방안이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박사모의 상당 부분은 박근혜 전 대표와 그 후광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구분하지 못하는 층이다. 이들에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신화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런 갈증을 경제를 회생시키겠다는 약속으로 설득하면 오히려 박근혜 전 대표의 낙마 상황을 빨리 받아들이고 CEO형 지도자 이명박에게 표를 몰아줄 여지도 없지 않다는 것이다. 경선 불복 및 불복 소송 운운하는 것은 그렇다면 조만간 잦아들 가능성이 크다.

◆경제 회생이 관건, 이 비전 못 보여주면 극추락 위험도

이제 이 전 시장을 막아설 것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범여권은 지지율이 극히 낮다. 민주신당은 원내 1당을 목전에 두고 있으나, 국민 지지율이 1%라는 기형적 상황에 말려들어 집안단속도 못하는 처지다.

당 개혁에 일말의 진통이 있겠지만, 위에서 적은 여러 사유로 결론적으로는 큰 방해가 안 될 여지가 높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문제, 그러나 가장 큰 문제가 남아 있다.

높은 지지율, 당 개혁의 정당성, 보수파의 마음 돌리기 가능성 등등 많은 장밋빛 전망들이 나오고 있지만, 그런 이명박 전 시장과 루즈벨트 대통령을 전적으로 동일화하기에 아직 고비가 남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결과물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결론적으로 빅딜구상을 현실에 접목해 성과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무리수가 다 용서된 것처럼, 이명박 전 시장에게도 모든 무리수를 둘 강한 여론 뒷받침이나 정당성, 참모조직 등이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답으로 모든 걸 설명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남는다.

벌써부터 이 전 시장의 트레이드 마크인 대운하가 대구, 경북에서조차 먹히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10월 남북 정상회담으로 흔들기를 할 태세다. 그러므로 이 전 시장으로서는 어서 대운하에 버금가는 대구상을 내놔야 한다. 더욱이 그 내용은 범여권의 집중 난타가 이어질 9월초까지 마련되어야 하고, 그 구상은 상당히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

당내 경선에서 내놓은 것처럼, "나는 할 수 있다"는 엉성한 답변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우려는 그래서 나온다.

결국 이명박 전 시장이 21일 내놓은 당의 대대적 개혁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내지는 괜한 헛소리냐 아니면 그야말로 한나라당판 뉴딜이라는 '대박' 상품이 될 것이냐는 이 전 시장 본인에게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명박 대선후보는 한나라당의 루즈벨트 대통령, 우상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당 분위기도 모르는 철없는 사람으로 기록될 것인가, 이는 대한민국이 대변화를 겪느냐 마느냐와도 관련된 중요한 요소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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