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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코리아=국희도 칼럼] 사법부를 두들겨 패는 것이 요즘 영화의 트렌드 중 하나인 모양이다.

지난해 하반기 ‘도가니’에 이어 올해 들어서는 ‘부러진 화살’로 영화의 실제 재판을 담당한 재판부가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아직까지도 곤욕을 치르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는 지난 2일 개봉한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가 검찰 권력까지 공격의 표적으로 만들었다.

1980∼90년대를 배경으로 한 ‘범죄와의 전쟁’에는 폭언과 폭행은 다반사고, 금품을 받고 수사를 무마시켜주는 불법을 서슴지 않는 타락한 악질 검사들이 나온다. 이런 일련의 영화들이 줄곧 권력의 핵심인 사법부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3개의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지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허구가 본질이다. 그런데도 영화를 관람하거나 대강의 스토리 라인을 전해들은 이들은 판사와 검사 등 대한민국에서 법을 다루는 권력기관 전체에 대해서 나쁜 이미지와 혐오감을 갖게 된다.

영화는 독재권력이 좋아하는 소유물이었다. 특히 영화가 가진 대중 선전 선동성을 맨 먼저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공산주의 국가였다.

제정러시아를 무너뜨리고 공산주의 혁명을 완성한 레닌은 일찍이 대중을 교화하는 데 영화가 최고의 수단임을 알아채고 이를 적극 활용했다.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라고 하지만, 현실을 그대로 찍어온 필름은 다루는 자의 편집 능력에 따라 실사(實寫)에 담긴 장면의 왜곡과 조작이 충분히 가능하다.

대표적인 작품이 1925년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만든 무성영화 ‘전함 포템킨’이다. 소위 몽타주 기법을 최초로 사용한 예술영화로도 대접받는 고전이지만, 그 내용은 1917년 제정러시아 차르 체제를 뒤엎은 공산혁명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전형적인 선전 선동 영화로 더 유명하다.

선전 선동 도구로서 영화를 십분 활용한 다른 예가 나치 독일이다. 나치의 선전부 장관, 당의 선전부장이었던 요제프 괴벨스는 무려 1200편의 선전영화를 제작했다. 괴벨스가 만든 선전영화에는 엔터테이닝 요소를 위해 스타배우와 유명 감독들을 기용한 극영화도 많았다.

얼마 전 사망한 북한의 권력자 김정일도 영화의 선전 선동적 기능을 중시해 수많은 영화를 만들었으며, 영화를 더 잘 만들기 위해 대한민국 영화계의 거물이었던 신상옥-최은희 부부를 홍콩에서 납치하기까지 했다.

영화는 공산국가와 독재국가에서는 권력이 독점하는 선동 선전적 매체였지만, 자유민주주의 세계에서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회 발전을 짚어주는 중요한 매체로 기능해 왔다.

자유세계에서 영화는 예술 장르 중에서도 대중상업문화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아무리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상업영화라고 해도 알게 모르게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관객에게 끼친다. 현실이 아니면서도 관객들에게 현실로 느끼게 하는 ‘현실 아닌 현실’이 영화의 힘이다.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영화 속에 훨씬 더 많이 등장했던 경찰관. 그 영화 속에서 경찰관들은 나쁜 경찰보다는 좋은 경찰들이 훨씬 더 많았으니, 경찰청은 요즘 되레 영화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법 집행기관이라고 해야 할까.

법을 다루는 권력기관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권력기관으로 분류되는 검찰·법원과는 달리 고위층 간부보다는 말단 경찰관들이 주요 구성원인 경찰청은 서민적인 직업군으로 분류된다. 그 점이 요즘 영화들의 ‘법 권력 때리기’에서 경찰 권력이 제외돼 있는 이유일 것이다.

영화가 ‘사실이 교묘하게 조작된 허구’라고 해도 400만명 관객을 동원한 ‘도가니’와 최근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부러진 화살’과 ‘범죄와의 전쟁’에서 알 수 있듯이 사법기관 종사자들은 반성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중요한 건 영화 속의 이야기들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영화에 담으려고 했던 영화 제작 관련자들의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수많은 국민들이 공감해주고 분노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아마도 해방이후 독재권력을 거쳐서 정치와 사회가 민주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여전히 비판의 사정권에서 벗어나 있던 사법부와 검찰 등 법 권력들이 이제야 비판과 성찰의 도마 위에 올랐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 점을 잊지 않고 새겼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아직은 억울함을 호소할 처지에 있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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