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지 않으면서도 존재감 돋는 공감연기로 관객 눈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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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코리아=김범태 기자] 이 배우, 느낌 있다. 수줍은 듯하면서도, 당차다. 마치 베테랑 타자들에게 칠 테면 쳐보라는 식으로 직구를 마구 내리꽂는 겁 없는 신인투수 같다. 솔직히 그가 맡은 배역에 대해서는 별 기대감 없이 객석에 앉았다. 하지만, 작품을 보는 내내 원작인 영화보다 더 생동감 있게 살아있는 캐릭터를 그려내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화제의 연극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사월이’ 역을 맡은 배우 김진아다.

‘사월이’는 ‘광해’의 대역으로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하선’과 에피소드를 만드는 인물 중 하나. 왕에게 단팥죽을 들이거나 ‘중전’과의 알콩달콩한 로맨스를 잇는 가교역할을 하는 기미나인이다. 김진아는 자칫 ‘하선’과 ‘광해’에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질 뻔한 이 작품에서 ‘사월’이란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의 연기는 작은 역할이라도 배우의 열연이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되고, 작품 속에서 어떤 존재감으로 각인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김진아 역시 이 작품에 출연하는 다른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맡은 배역을 원작 속 캐릭터와 차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영화가 워낙 크게 성공한데다, 역할을 맡았던 배우 심은경이 1000만 관객 돌파의 숨은 공로자로 인정받을 만큼 출중한 연기력을 선보였기에 부담도 컸다.

게다가 열다섯 살의 ‘사월이’를 그려내기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너무 나이가 많이 들어보였다. 하지만, 그동안 밝고 귀여운 이미지의 어린 역할을 많이 소화했던 그로서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낼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극 중 ‘사월이’는 성장과정 속에 남모를 아픔을 많이 갖고 있는 인물이에요. 하지만, 저는 ‘사월이’를 마냥 어두운 아이로 표현하고 싶진 않았어요. ‘중전’과 저를 뺀 나머지 등장인물이 모두 남자고, 소재도 다소 무거운 주제의 이 작품에서 ‘사월이’만이라도 밝고 통통 튀어 극에 활력을 주고 싶었죠”

김진아의 ‘사월이’는 왕이 된 ‘하선’과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난다. 그렇지만 너무 큰 존재감으로 드러나거나 튀어서는 곤란했다. 김진아는 그 중심선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사월이’를 연기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이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관객들은 진실하고 순박한 ‘사월이’의 활달함 뒤에 숨겨진 상처와 비극적 죽음에 더 큰 공감을 갖게 됐다.

많은 관객들이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죽어가는 ‘사월이’를 가슴에 품고 오열하는 ‘하선(광해)’의 모습을 꼽는다. 자객의 칼에 맞아 횡사하는 ‘사월이’를 안고 ‘하선(광해)’은 “죽지마라, 어명이다”라며 울음을 터뜨린다. 여기서 ‘사월’은 백성의 형상화다. 힘없고, 착취당하며, 죽어가는 백성이다. 그래서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김진아가 꼽는 명장면은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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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월이’가 죽기 바로 직전 신이 가슴에 짠하게 남아요. 임금이 ‘중전’에게 은장도를 갖다 주라면서 ‘사월이’를 부르세요. 그러면서 ‘네 어미를 만나면 꼭 행복해야한다’고 말씀하시죠. 저는 그 장면에서 항상 눈물이 나더라고요”

왜일까. 임금이 된 천민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일까?

“작품 속 감정도 있겠지만, 무대 위에서 함께 연기하는 (배)수빈 오빠나 (김)도현 오빠의 얼굴을 보면 눈물이 나요. 아빠미소를 지으면서 ‘고맙다’ ‘행복해야 한다’라고 말하는데, 그 진심이 뭉클하게 와 닿아요. 그래서...”

인터뷰 중에도 그 장면을 생각하면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는지, 동그란 눈망울에 이슬이 반짝인다. 영락없는 배우다. 그 모습이 눈물 많은 ‘사월이’와 닮았다. 그러고 보니 김진아는 그동안 우는 연기를 참 많이 했다.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에너지 소비가 많았다”고 표현할 만큼 눈물연기와 친했다. 동료배우들은 이런 김진아에 대해 “한번 감정을 잡으면 순간적으로 상황에 몰입하는 집중력이 대단하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어느덧 ‘사월이’와 작별해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이번 작품을 통해 ‘김진아’라는 배우의 존재감을 알린 그는 “관객들에게 저 배우가 출연하면 믿고 공연을 봐도 되겠다는 신뢰 받는 연기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연극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그의 이런 욕심이 이뤄지는 첫 걸음이 될 듯하다.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끝인사를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그가 이날 인터뷰에서 했던 말 중 가장 길었다. 가녀리게 떨리는 목소리에 진심이 푹 담겨있었다.

“저희 작품을 스무 번이나 보셨다는 분들도 계시고, 여러 번 보셨다는 관객들이 참 많아요. 정말 뭐라고 말씀 드려야 할지 모를 만큼 감사드려요. 특히, 수빈 오빠와 도현 오빠 팬들의 정성어린 선물도 정말 고맙게 잘 받았어요.

한 달반 정도 공연했는데, 솔직히 이쯤 되면 ‘내가 진심을 다해 연기하고 있나’ ‘아니면 매너리즘에 빠져 기계처럼 하고 있나’ ‘실력이 정체되어 있는 건 아닌가’ 여러 가지 자문을 하게 돼요.

그때마다 관객 여러분의 성원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아요. 저뿐만 아니라, 저희 ‘광해 팀’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이 정말 진실하게 공연하려고 무진 노력하고 있어요. 열심히 하는 만큼, 여러분도 진실 되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선호준(스튜디오 블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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