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뮤지컬 첫 도전, 백지 같은 무대에 자기 색을 입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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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코리아=김범태 기자] 뮤지컬배우 선민. 아직 필모그래피는 화려하지 않지만, 그가 무대 위에 새겨가는 족적은 뚜렷하다. 2010년 뮤지컬 ‘지킬앤하이드’로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가창력과 섹시한 안무로 단박에 평단의 주목을 끌어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기대 속에 올해 창작 뮤지컬 ‘아르센 루팡’에 출연하고 있다. 어두운 거리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뛰어난 노래실력으로 오페라가수가 되어 귀족 사회의 일원이 되는 ‘조세핀’ 역이다. 관능적이며 도발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이 캐릭터는 그에게 제격이다.

뛰어난 변신술과 마술 실력을 소유한 20세기 프랑스 최고의 도둑 ‘루팡’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그의 두 번째 뮤지컬 출연작. 선민은 이번 무대를 통해 창작 뮤지컬이라는 또 다른 연기의 문을 활짝 열었다.

하지만 ‘아르센 루팡’은 개막 초기, 매끄럽지 않은 극의 흐름과 이른바 ‘쪽 대본’ 논란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에 놓여야 했다. 신예 선민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당황스럽고, 낯선 경험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의연했다. 힘들었지만, 뮤지컬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

“사실 이 작품의 출연을 결정했을 때, 창작 작품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주변 분들이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라이선스 작품에 익숙한 제가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던 거죠. 솔직히 ‘지킬앤하이드’야 한두 번 다듬어진 작품이 아니잖아요? 확실히 다르긴 다르더라구요”

작품이 막을 올린 후 지난 두 달 사이, ‘아르센 루팡’은 많이 조형화되고, 스토리의 밀도를 높이는 등 안정을 찾았다. 선민도 캐릭터에 자신만의 색깔을 옷 입혔고, 작품의 윤곽을 그릴 수 있었다. 그가 전작과 비교하며 알기 쉽게 설명했다.

“뮤지컬은 스태프나 배우가 처음부터 끝까지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는 종합예술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꼈어요. ‘지킬앤하이드’는 마치 잘 만들어진 옷 같아요. 하지만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제 몸에 맞는 캐릭터를 만들어야 하니까 당연히 힘들었죠. 그 과정이 버겁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배우로서는 그만큼 더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한 단계 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무엇보다 이종석 연출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 연출은 선민이 생각하는 대사 아이디어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작품에 반영해 녹여냈다. 그때마다 ‘아! 내가 생각한 게 틀리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

작품은 물론 ‘루팡’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그러나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조세핀’을 둘러싸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연인 ‘레오나르도’와의 어긋난 욕망, ‘제브르 장관’과의 내연관계, 곧 이어지는 배신과 비참한 최후 등 ‘조세핀’은 복잡한 다면성을 지니고 있다.

선민은 관객들이 ‘조세핀’을 무조건적인 악역으로만 보지 않기를 기대했다. 이는 그가 ‘조세핀’을 연기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이기도 하다. 그가 왜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 그만의 이유와 사연이 도드라지길 바랐다. 욕망에 눈이 멀어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지만, 깊이 있는 연기를 통해 ‘조세핀’의 인간적인 매력을 표현하고 싶었다.

“사실 ‘조세핀’이 악역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저는 캐릭터를 그렇게 단면적으로 만들고 싶진 않았어요. 관객들에게 ‘레오나르도’에게 왜 그렇게 극단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하고 싶었죠. ‘특수한 여자’가 아니라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이 다른 사람보다 강한 인물이에요. 마냥 악녀라기보다는 꿈이 큰 여자로 봐 주셨으면 해요”

선민이 그려내는 ‘조세핀’은 마치 어두운 진보라색 같은 느낌이다. 귀족적 아름다움과 화려한 매력 뒤에는 남모를 성장의 아픔이 숨겨져 있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독한 악랄함이 내재돼 있다.

특히 ‘레오나르도’를 살해하는 모습은 관객들이 자기도 모르게 ‘헉!’하고 외마디 비명을 내뱉을 만큼 예상을 뛰어넘는 섬뜩한 연기를 선보인다. 이 장면은 뮤지컬 ‘아르센 루팡’에서 객석의 집중도가 가장 높은 신 중 하나다. 그의 연기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연출이다.

선민은 이번 작품을 통해 분명 한 단계 더 성장했다. 백지 같은 무대 위에 자기만의 색깔을 입힌 캐릭터를 그려내는 법을 터득했다. 마치 약간은 두렵고 떨리면서도 설레는 첫사랑의 느낌처럼 ‘아르센 루팡’이라는 초연작과 끈적한 첫 인연을 맺었다.

그는 “지금 당장은 성숙했다고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이를 계기로 연기적으로 성장하는 어떤 모티브가 분명히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그런 면에서 ‘아르센 루팡’은 더 애착이 가고,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고 긍정했다.

자리를 일어서며 그에게 배우로서의 꿈을 물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누군가 나의 연기를 보고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답했다.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연기하며, 보는 이들에게 치유를 선물하고 싶다는 그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는 배우가 되는 게 궁극의 목표”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배우로서의 책임감을 더 갖게 되었다는 그가 앞으로 얼마나 더 높이 뻗어갈 것인지를 지켜보는 것도 유의미한 일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치명적 매력의 ‘조세핀’ 선민을 만날 수 있는 창작 뮤지컬 ‘아르센 루팡’은 오는 5월 5일까지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에서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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