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공무원서 정치인 험난한 변신...해양플랜트산업에 관심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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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원실을 찾은 이들에게 자신이 직접 쓴 책에 사인을 해주며 밝게 웃고 있는 새누리당 김한표 의원.[사진제공/JWS]

[투데이코리아=이병욱.신기한 기자] 김한표(경남 거제)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해 5월 제19대 국회 개원 소감으로 “거제 지역 발전에 남다른 포부를 가지고 있다”며 “현재 조선 산업의 메카이기도 한 거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을 계획이다. 거제시가 관광, 물류 등의 중심지로 거듭나기 위해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전했다.

그는 자신을 믿고 지지해 준 거제 시민들을 위해 우편물 배달지연 문제를 해결했고, 거제 시민들의 오랜 숙원인 ‘지심도 관리권 이관’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특히 김 의원은 해양플랜트산업에 관심을 보이며 해양플랜트산업지원센터 등의 당위성을 주장했고, 이를 거제에 유치하는 쾌거도 이뤘다. 이 센터는 2030년 약 5000억불 규모로 세계시장 성장이 예상되는 해양플랜트산업의 중추 역할을 할 예정이다.

지난해 7월에는 경찰공무원들을 위해 경찰관직무집행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이 개정안은 경찰관들이 적법한 법 집행으로 인해 일반 국민이 손실을 입은 경우, 그 손실에 대해 경찰관 개인이 아닌 국가가 보상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그는 “국민의 권익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경찰관의 안정적인 직무집행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며 “현장 경찰관이 사비를 털어 비용을 메우는 모순을 바로잡는데 있다”고 개정 취지를 밝혔다.

경찰서장 출신인 김한표 의원은 지난해 제19대 총선에 당선돼 염원하던 여의도에 입성했다.
총선에서 당선 된지 어언 1년. 김 의원은 국회의원 300명 중 유일하게 국회 본회의 100% 출석․재석을 할 만큼 성실한 의정생활로 정평이 났다. ‘2012 국정감사 우수의원상’ 등 270여개의 시민단체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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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국회 상임위 활동 중 질의를 하고 있는 김한표 의원[자료제공/김한표 의원실]

하지만 20여 년 동안 몸담았던 공직을 접고 지난 2000년의 제16대 총선 출마로 처음 정치판에 뛰어든 김 의원의 지난 세월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기소, 구속, 실형 선고, 집행유예, 18대 총선 낙선 등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고단한 삶에 전 경찰서장이라는 신분으로 택시운전대를 잡기도 했다는 김 의원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경찰시험 합격 후 청와대 입성까지 ‘승승장구’

김 의원은 6.25전쟁의 포탄 소리가 멈춘 이듬해인 1954년 경남 거제에서 5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한 후 졸업할 때까지 상위권을 놓치지 않은 우등생이었다. 그러나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달았고, 3수 끝에 한국외국어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군에서 제대한 후 장학금으로 힘들게 졸업한 그는 대학원에 가서 계속 공부하고 싶었으나 가세가 기울어 포기해야 했다.

그 때 김 의원은 함께 공부하던 친구에게서 우연히 경찰간부 후보생 시험에 대한 얘기를 듣고 덜컥 응시했고 4차 시험까지 치르는 까다로운 관문을 단번에 통과한 뒤 1년간의 경찰종합학교 기본교육을 거쳐 1983년 4월 제31기 경위로 임관됐다.

김 의원은 곧바로 청와대 경호실 101경비단으로 파견되면서 청와대와 인연을 처음 맺었다.

임관 2년8개월 만에 동기생 중 가장 먼저 경감 계급장을 단 김 의원은 청와대에 들어간 지 5년 5개월 만인 1988년 서울 종로경찰서 수사과 조사계장으로 처음 일선에 배치됐다.

하지만 김 의원은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당시 민자당 후보의 경호요원으로 발탁됐다. 후보 시절 그를 눈여겨본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름으로 청와대 민정비서실 행정관으로 일하면서 모스크바, 파리, 알래스카, 런던 등 각국을 방문할 기회를 얻어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그는 “10년 넘게 청와대에서 일하며 연속해 대통령 세 분을 모신 별난 전력을 가진 경찰 출신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YS의 ‘문민정부’가 끝난 뒤 고향 거제의 경찰서장으로 부임했다. 자주 뵙지 못한 부모님을 가까이서 모시고 싶어서였다. 김 의원은 ‘금의환향’이라는 플래카드까지 걸어 준 고향에서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려고 밤낮으로 현장을 누볐다.

‘경찰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믿음으로 개혁을 밀고 나가는 서장의 갑작스런 출현에 못마땅해 하던 직원들도 차츰 ‘변화의 물줄기’에 동참했다. 김 의원은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 현지 언론이 경남에서 가장 개혁과 변화가 잘된 경찰서로 거제경찰서를 꼽았다”며 “내가 재임 시절 역점을 두고 추진했던 시책들이 사례로 제시됐을 때 매우 기뻤다”고 회고했다.

‘제2의 인생’ 국회의원 도전으로 잃어버린 세월

그는 고향 발전에 조금 더 이바지하고 싶다는 생각에 국회의원 출마를 결심했다. 지난 2000년 1월 합천경찰서장으로 발령 나자 과감하게 사표를 던진 이후의 역정은 험난하기만 했다.

그에게는 정치인이 어렸을 때부터의 꿈이었다. 하지만 아내를 비롯한 가족의 만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족들은 “왜 잘 나가는 경찰서장을 그만두고 정치에 뛰어드느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막상 정치를 시작하고 나니 간과 쓸개까지 다 빼줄 것 같던 사람들이 등을 돌렸을 뿐만 아니라 뒤에서 헐뜯기까지 했다.
마침 그 무렵에 창당한 민주국민당의 공천으로 제16대 국회의원선거에 나갔으나 불과 2700여 표 차이로 낙선했다. 그 후 상상도 못할 일들이 연달아 벌어졌다.

유세 도중 상대방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은 그는 다음번 선거 출마를 위해 항소했고, 결국 벌금은 80만원으로 줄었다. 벌금 100만원이 넘으면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박탈된다. 김 의원은 “선거에서 떨어져 호소할 곳조차 없는 외로운 신세여서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다”며 “지금 생각해도 편파적인 수사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거제경찰서장 재직 당시 공갈 협박으로 5000만원을 갈취했다는 내용이 보도됐다. 김 의원이 “어떻게 당사자에게 확인하지도 않고 이런 기사를 쓰느냐”고 거세게 항의하자 해당 기사를 쓴 기자는 “검찰 조서 내용을 보고 쓴 것”이라고 했다.

이듬해 여름에는 민국당 사무부총장으로 있던 김 의원에게 조선소 직원을 자칭한 사람이 민원이 있다며 상담을 신청했다. 그러나 약속 장소인 민국당 당사 1층에 나간 그를 맞은 것은 구속영장이었고 졸지에 수갑이 채워져 압송 당했다. TV에서는 ‘김한표 전 거제경찰서장 뇌물 혐의로 구속’이라는 뉴스가 계속 나왔다. 뇌물 액수는 자그마치 1억5000만원이었다.

김 의원은 “지금까지 18여 년 동안 공직생활을 하면서 뇌물이라곤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다”고 강조하고 “당시 집을 짓다가 IMF 사태로 자금이 달려 친구들에게 차용증을 쓰고 빌린 돈이 하루아침에 뇌물로 둔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연히 법원은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이자 미지급 건에 대해서만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형이 내려졌다. 그는 억울하게 구속돼 수감생활까지 한 기억을 떠올리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는 동안 가정형편은 매우 어려워졌고, 아이들은 아르바이트, 아내는 일터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시 큰 아이가 중학생, 막내가 초등학생이었는데 청소년기에 고통을 준 것에 대해 매우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택시기사로 변신한 경찰서장

2006년 어쩔 수 없이 정치를 잠시 떠나게 된 김 의원은 택시 운전으로 고향에 봉사하기로 마음먹었다. 면허증을 1급 보통으로 갱신하고 경남택시조합에서 자격증도 땄다. 처음에는 시비를 거는 동료기사들도 있었지만 차츰 친해지고 서로 위로도 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는 “택시에 몸을 싣고 참 많은 인생 공부를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만취된 손님에게 차비 한 푼 못 받은 일, 손님이 토한 분비물을 닦아내던 일, 가끔 그를 알아보고 놀라던 손님들과 즐겁게 얘기하던 일 등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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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업무 지시를 하고 있는 김한표 의원[사진제공/JWS]

김 의원은 총선에서 당선한 후 이 경험을 살려 지난해 여름 휴가에 ‘민생 드라이빙’이라는 이름으로 택시 운전을 하며 민생 탐방을 했다. 생생한 민생 현장을 접하고, 시민들과 직접 소통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에 대해 그는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는 자세를 유지하면서 지난 총선기간 동안 저를 아낌없이 지지해준 시민께 보은하고 싶었다”며 “단발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의정활동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시민의 소리를 청취하기 위한 기회를 자주 가질 계획”이라 말했다.

김 의원은 “국민 모두가 성공하는 세상을 위해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 나의 생활 철학”이라며 “지금까지의 인생 경험을 토대로 서민정치, 생활정치, 봉사정치를 정치관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을 위한 제도적 장치와 배려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성장과 함께 분배를 실천하는 복지사회, 복지국가를 만들어 가는 데 앞장서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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