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한류팬 친구의 손에 잡고 처음 한국행 -아가와의 작은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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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인터뷰 내내 밝은 미소를 잃지 않던 아가와씨.
아가와 타에코. 올해 나이 51세. 일본 도쿄 도심의 에도코(江戶子·도쿄 토박이)인 그녀가 한국의 소도시 경북 영천에서 남편과 두 아이들, 시동생과 함께 산다.

남편과 시동생은 몸이 불편해 경제활동은 못하고 그녀가 한 지붕의 기둥역할을 한다. 올해로 결혼15주년이 된 그녀의 한국생활기를 들어봤다.

[투데이코리아=허수현 기자] 아가와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일본어를 배우러 그녀의 집에 다닌 게 벌써 10년 전이다. 인터뷰 차 1년 만에 연락을 했다. 며칠 뒤 그녀의 집 근처 커피숍에서 만났다.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아가와는 세월의 흐름을 비켜나간 듯 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건네는 질문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냥 평소에 담소를 나누는 것처럼 편안하게 말해도 된다고 하자 그 제서야 술술 이야기가 방울 되어 피어났다.

지난 1994년 한류를 좋아하던 친구의 손에 이끌려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 친구의 소개로 1998년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어가 걸음마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형언할 수 없는 끌림에 평생 그의 곁에 있겠다고 결심했다.

꿈같은 결혼생활은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부족한 한국어실력이 문제로 작용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남편과 대화를 하고 싶어 악착같이 공부했다.


1994년 한류 파 친구와 첫 한국여행
남편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
한국 생활 적응은 힘들었지만
정(情)이 느껴졌다.



“우리 남편은 사람은 좋은데 사회생활에 적합한 성격은 아니야”라고 말하며 남편에 대해 털어놓는다. “집근처 횟집에서 두 달 일한 게 끝이야.”경제적으로 힘들어 뭐라도 해야만 했다. 한국말이 유창하지 않아 분식집에 일하게 되었는데 그 가게주인 딸이 일본어를 공부하고 싶어 해서 가르쳐주기 시작한 것이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찾아 왔다.

지난 2000년도 첫 아이를 출산하고는 하루에 25명의 학생이 왔다고 한다. 십분도 쉴 수 없을 정도로 강행군이었지만 실질적인 가장이란 무게를 버티려면 감내해야했다.

한국의 시월드에 입성하는 것도 고충이 따랐다. 처음에 말도 잘 못 알아들어 헤맬 때 뒤에서 친척들이 흉을 많이 봤을 것 같다고 한다. 표정이나 말투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었을 터. “지금은 웃으면서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게 됐지만 당시에는 서럽고 슬펐어.” 그리고 결혼하자마자 몸이 불편한 시동생과 함께 살게 됐다. 시동생은 교통사고로 다리 한쪽이 불편하다. 방 두 개인 좁은 아파트에 신혼의 달콤함은 느낄 수 없었다.

너무 싫었지만 장남인 남편이 동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완고해 그 마음을 받아주었다. 시동생은 자신 앞으로 나오는 국가보조금을 쪼개서 조심스레 내밀었다.

첫 아이 출산 후 과외를 계속해야 했던 그녀에게 남편은 또 다른 복병이었다. 육아에 소홀했던 것이다. 장소마련이 마땅치 않아 집에서 과외를 했는데 아이의 울음소리가 나서 곤욕을 치렀다. 남편은 달랠 생각은 안하고 멍하니 앉아있거나 자기 할 일에 바빴다.

과외가 모두 끝나면 경상도 남자의 명대사 “밥 차려라”가 귀에 들려왔다. 거기에 술을 좋아해서 많이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날도 많았다. 일도 안하고 놀면서 도대체 왜 이러나 싶었다.

‘아빠는 밖에서 돈 좀 벌어와’라고 농담조로 말은 했지만 화를 내면서 닦달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남편은 많이 바뀌었다. 그 마음이 전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그는 요즘 교회에서 사무 일을 보고 있다. 무보수로 일하는 봉사활동이지만 술도 끊고 집안일에도 적극적이다. “남편은 본래 심성이 착한 사람이야. 다만 그것을 잘 표현하지 못 했을 뿐 이지. 싹수가 노랬다면 진작 일본으로 가 버렸을 지도 모르겠어.”

지금까지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을 물었다. 아가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두 아이를 낳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딸 하나 아들 하나, 36세의 노산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건강하게 태어나주었어. 중학생이 된 딸은 친구처럼 느껴져. 이제 사춘기에 접어 들어 걱정인데 잘 헤쳐 나갈 거라고 믿어.”

아이들은 시에서 보내준 다문화가정 전담교사와 공부하면서 엄마의 나라에 대해 알아 가고 있다. 아이들은 일본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고 좋아한다고 한다. 일에 바빠서 일본어를 제대로 가르쳐줄 시간은 없지만 앞으로 조금씩 알려줄 생각이다.

남편 때문에 힘들었지만 극복
두 아이를 낳은 것은 더 없는 행복
가족들과 지금만큼 건강히 살고 싶어
한국생활은 ‘운명’이다

지난 달 19일 아가와는 두 아이들과 6년 만의 친정나들이를 다녀왔다. 그 세월만큼 그녀의 동네는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자주 가던 곳도 변하고 왠지 모를 낯선 느낌에 한국에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 매콤한 김치도 먹고 싶고.(웃음)” 한국아줌마가 다 된 것 같다고 하자 눈을 찡긋거린다.

아가와의 앞으로의 꿈은 소박하다. 지금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일본어를 가르쳐주는 것. 그리고 두 아이와 남편, 시동생과 함께 지금처럼 사는 것. 거기에 조금 욕심을 더한다면 앞으로 자라날 아이들에게 넓은 집을 가지게 해주고 싶은 것이 전부다.

누가 봐도 고생길을 사서 걸어가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정작 아가와는 자신이 힘들게 살고 있긴 하지만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그건 바로 한국사회에만 존재하는 정(情)이 힘이 되어준 것 같다고 했다. 시댁식구들과 조금 마찰은 있었지만 일본에 있는 친척들보다 더 친근함이 느껴진 것도 그 때문이었을 터. 아가와는 이 감정을 ‘운명’이라고 했다. 그 단어의 힘이 지금까지 그녀를 지탱해준 것은 아닐까.

외국인으로서 많은 고충을 떠안으며 살았을 그녀를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아리다. 수많은 굴곡을 견딘 그녀를 보면 흙속의 진주 같다. 이제 그 흙을 걷어내고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살아갈 아가와 타에코의 인생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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