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매년 내놓고 있는 '공적자금관리백서'에 따르면 2003년 6월 말 현재 투입된 공적자금은 총 160조 5천억 원에 달한다.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26%다. 워낙 엄청난 액수인지라 보통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돈인지 가늠조차 안 될 정도다.

160조 5천억 원이면 국민 1인당 336만 원 가량을 낸 셈인데 이 돈이면 경부고속철도(19조 원)를 8개 놓을 수 있으며, 인천국제공항(5.6조 원)을 무려 28곳 지을 수 있는 돈이다.
더구나 이 돈의 대부분은 '빚'이다. 160조 5천억 원 중 채권을 발행해 조달한 공적자금은 102조 1천억 원에 달한다.

채권 원리금과 이자를 갚아야 할 채무자는 지금의 기성세대가 아니다. 장기간에 걸쳐 나눠 갚아야 하기 때문에 상당 부분의 채무는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돌아갈 공산이 크다. 후손에게 무지막지한 빚을 떠넘긴 셈이다. 공적자금의 직접적인 수혜자인 금융기관과 나눠 갚는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최종적인 부담은 우리 후세의 몫이다.

그나마 새 정부 들어서는 공적자금 상환일정이 자꾸 늦춰지고 있다.
가급적 현 세대 내에서 공적자금 상환을 마무리하기 위해 예산에서 매년 2조 원씩 갚기로 계획을 세웠지만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경기활성화를 명분으로 2004년 예산에서는 공적자금의 상환을 연기해 놓은 상태다.

상환을 미룰수록 나중에 부담해야 할 원금은 늘어나게 된다. 늘어나는 만큼 이자도 불어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자식들의 빚은 점점 더 불어나고 있는 것이다.
공적자금(public fund)의 사전적 의미는 '급박한 경제위기를 맞아 정부가 동원하는 구조조정 자금'이다. 정부가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이나 주식을 사 주거나, 부실영업으로 문닫은 금융기관을 대신해 고객예금을 갚아 주는 데 쓰이게 된다.
우리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일본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 금융 구조조정을 거쳤던 대부분 나라가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공적자금을 투입해 금융위기에 대처하는 방식 자체에 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별다른 반론이 없다. 한국의 경우에도 공적자금 투입을 통해 여러 분야에서 긍정적인 성과를 거뒀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물론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국민들의 희생과 노력이었다. 그러나 공적자금이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금융부실을 신속히 처리하는 과정에서 금융기관의 건전성과 수익성을 높일 수 있었고, 차입경영 등 잘못된 기업 금융관행을 바로잡는 데도 나름대로 상당한 역할을 했다.

다른 해법이 없는 상황에서 공적자금의 조성과 투입은 어려운 경제상황을 국회와 국민에게 솔직히 설명하고 협조와 동의를 묻는 '정공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관료로서, 더욱이 공적자금의 조성과 집행에 깊숙이 간여했던 나로서는 지금도 무거운 마음을 가눌 수 없다. 지난 2000년 당시 재경부 금융정책국장으로서 2차 공적자금 조성업무를 맡았을 때부터 가져왔던 마음의 짐이다.

다만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공적자금의 역사'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후세의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해 지금 세대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이종구 /국회의원(한나라당, 서울 강남구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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