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에 빠진 한국 교회 깨워...예수처럼 살다가 예수처럼 서른셋에 떠난 이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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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행복미디어 신간 ‘이용도 목사 평전 : 기독교의 재출발’ 표지

[투데이코리아=이나영 기자] 오늘날 한국교회의 아킬레스건은 예수보다 사람이, 말씀보다 물질이 앞선다는 점이다. 한국교회가 자랑하던 신앙의 순수성은 옛말이 되었고, 교회가 간직해야 할 소금의 맛은 밍밍해졌다. 목회자는 넘쳐나지만 자기를 내어맡길 정도로 존경하고 따를 지도자를 보기 어렵다는 얘기도 여기저기서 나온다.

대형 교회를 이룬 목회자들은 있지만, 말년에 물질과 교권주의, 성문제 등으로 무너지는 소식이 들려오곤 하여 가슴을 철렁이게 한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는 말이 나온 지 벌써 오래다.

그렇다면 이런 일들은 갑자기 생긴 걸까? 1920년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책의 주인공인 이용도는 목회자가 좋은 옷을 입어야 쓰임을 받고, 사교술이 뛰어나야 교회 일을 잘 본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지적했다. 교회를 “울긋불긋”하게 꾸미는 것에 관심이 있지,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나중이라고 꼬집었다.

이런 가운데 청년 신학도 정재헌(33)씨가 80여년 전의 독립운동가이며 최고의 설교자, 예수에 미친 광인, 거지와 버림받는 이들을 예수님처럼 모신 사랑의 사도 이용도 목사를 오늘로 초청하여 기독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이용도 목사 평전 : 기독교의 재출발’은 이용도 목사의 짧지만 강력한 영적인 삶을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냈다.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목회자로서 어떻게 주와 양떼를 섬겨야 하는가에 있어서 이용도라는 ‘극히 값진 진주’와 같은 ‘롤모델’을 얻는 것은 한국 교회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오늘날 어떻게 재출발할 수 있을까?
자전거로 세계를 달린 청년 신학도의'용도사랑'결실
1931년 벌써 교회가 "참 교회돼야 한다" 외쳐

교회가 교회되기 위하여 부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믿은 이용도는 회개의 운동과 기도의 운동, 예수사랑의 운동을 전개하며 몸부림을 쳤다. 1928년 11월부터, 남감리회 원산지방에서 성령의 크신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성령께서 이용도를 사용하시어 1930년 10월까지 원산지방에 회개와 기도를 통한 부흥이 계속되게 하셨다.

어려서부터 기도로 단련되었던 이용도는 강원도 통천구역을 담임하면서 동시에 여러 곳에서 부흥회를 인도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회개의 눈물과 기도의 불길이 타오르게 했다. 설교를 했다 하면 2시간, 많게는 7시간까지. 기도는 2~3시간이 보통이다. 저녁에 시작된 기도가 아침까지 간 적도 많다.

이용도는 원산을 넘어, 감리교단을 넘어, 전국으로, 전 교파로부터 간청을 받아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몸은 하나인데 오라는 곳은 팔도사방이었다. 원산, 통천, 부천군, 평양, 서울, 개성, 인천, 당진, 거창, 사천, 통영, 양양, 진천, 용정, 연길 등 전국에서 그를 초청하고자 아우성을 쳤다. 어느 때에는 용도 모시기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가 가는 곳마다 성령의 불, 은혜의 불, 기도의 불이 떨어졌다.

한번은 협성신학교(현 감신대)에서 나흘간 부흥회를 했는데 학생들이 너무 뜨겁게 기도하자 사회자가 기도를 자제하도록 요청하는 일까지 있었다. 학교 측은 학생들의 기도를 막기 위해 기숙사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밖에서 열쇄를 채웠지만 학생들은 창문을 열고 탈출, 한 밤중에 무악산까지 달려가 기도를 하기도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추운 겨울 밤 이용도가 인왕산으로 기도하러 갔다. 그런데 날이 밝아도 내려오지 않자 동지 피도수 선교사가 그를 찾으러 갔다. 산에 가서 “목사님!” 하고 몇 번을 부르니 눈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이었다. 이용도 목사였다. 눈이 내려 온몸을 덮었는데도 기도에 집중하다가 이를 알지 못하고 계속 기도했던 것이다.

평안북도 북진 집회에는 용도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십 명이 캄캄한 밤에 산 몇 개를 넘으며 200리 길을 달려온 일도 있었다. 이용도의 설교에 취한 이들은 아이부터 60살 넘은 노인까지 다양했다. 용도 목사의 설교는 성령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여서 모든 것을 뒤로하고서라도 가서 들어야 할 정도였다.

이용도는 유독 정이 많았다. 거지를 데려다 자기 밥을 내어주고, 추울까봐 옷을 벗어 거지아이의 언 몸을 둘둘 말아주고 따뜻하게 녹여주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겸손해서 아무리 주변에서 자신을 공격해도 대응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를 했다. 예배를 망친 불량배를 끝까지 달려가 머리채를 잡고 내동댕이친 후 주먹을 날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목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 것은 잊을 수 없는 일화다.

집회를 했다 하면 성도들이 은혜 받고 기도로 난리가 나면서 용도는 목사들의 뜨거운 질시도 받았다. 이용도가 설교해서 교인들이 은혜를 받고 뒤집어지는 것을 기존 목사들은 그냥 보질 못했다. 너무 크게 기도한다, 불을 끄고 기도한다는 등의 이유로 코너에 몰리면서 감리교 교역자들의 추방운동, 장로교 어느 노회들의 ‘입국불허’ 등의 견제를 당한다.

이용도의 마지막 해인 1933년은 치욕의 해이자 영광의 해였다. 폐병 3기의 몸으로 주어진 시간 안에서 피를 토하던 용도는 1933년 2월 황해도 해주 부흥회 중에 멱살이 잡히고 얻어맞아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좋지 않았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된다.

감리교단은 이용도의 목사직을 정지시키고, 장로교단은 이용도를 버리지 않겠다는 성도들을 교회에서 추방시킨다. 쫓겨난 무리들은 한국 토착교회인 ‘예수교회’를 세워서 신앙을 이어나갔다. 이용도와 의형제처럼 가까운 이호빈 목사가 예수교회를 이끌어갔다. 이용도는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1933년 10월 2일, 33살의 나이로 쓸쓸하게 죽음을 맞는다.

이용도는 1995년 독립유공자가 되고, 1999년에는 감리교 목사직이 복권된다. 현재 이용도의 업적을 기리는 시비가 감리교신학대학교 안에 서 있다. 오늘날에는 감리교의 가장 훌륭한 인격자요 목회자이며, 한국교회사 최대의 부흥사로서 칭송받고 있다. 죽은 지 80년이 넘어 용도의 신앙이 이 땅에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이용도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예수교회 공의회, 이용도 신앙과 사상 연구회, 이용도 목사 기념사업회와 시무언선교회를 통해 ‘용도 신앙’을 작지만 귀하게 간직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이용도에 대한 연구와 저술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용도 연구로 학위를 받은 사람도 있고, 대학생들 가운데도 용도를 사모하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보게 된다.

정씨는 미국 버클리 음대에서 음악을 공부하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일본 미국 캐나다 영국 스페인 프랑스 스위스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러시아 등지를 달렸다. 미국 호브 사운드 성경대학교에서 기독교학을 전공했다. 3년간 중국 연길과 캄보디아에서 선교에 동참했다. ‘젊은 날의 발견’, ‘야 이놈아 성경에 다 쓰여 있다’의 저자다. 이용도 목사의 신앙을 통해 현 시대의 불신앙을 이겨나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정 씨는 ‘이용도 목사 평전 : 기독교의 재출발’을 통해, “이 땅에 이러한 사람이 있었다”는 기쁨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렇게 성도를 사랑하고 이렇게 동포를 사랑하여, 죽기까지 자기 십자가를 진 위인이 있다는 것은 민족과 교회가 누릴 특권이자 행운”이라고 밝혔다. 이용도 목사를 만남으로써 오늘의 한국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고 십자가를 지는 ‘기독교의 재출발’이 시작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정 씨는 이용도에 대해, “그는 80년 전의 잊혀진 옛사람이 아니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한국교회가 21세기에 활기차게 재출발하기 위하여 다시 살아난 사람이다. 물질과 명예, 자리다툼과 냉랭함, 영적 목마름으로 허덕이는 오늘의 한국교회를 구출해낼 신앙의 사표다”라고 말한다. 현대교회가 성경 말씀보다 사람 얘기를 더 하고, 기도보다 물질에 손을 내미는 모습을 콕 찌른 것이다.[자료:행복미디어/456쪽/18,000원 / 문의 02-2275-0924,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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