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의 7대 3 법칙, 내가 가진 것의 70%를 남에게 베푼다"


▲사진=중견기업을 경영하면서 사회복지에도 힘쏟고 있는 김우화·이순례 부부

[투데이코리아=양만수 기자]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참된 나눔의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 국내 중견기업을 경영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전세를 얻어 살며 전 재산을 사회복지 재단에 기부했다면 그 경지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루마 필름 코리아(루마썬팅) 대표이사이자 미오림 복지재단 이사장을 겸하고 있는 김 우 화(金又和)씨 얘기다.

지난 2003년 9월에 설립한 미오림 복지재단에 김씨가 투입한 유·무형 자산은 100억원에 이른다. 이쯤되면 가족들이 도시락 싸들고 말릴 만도 한데 오히려 아내가 더 적극적이다.

그의 아내 이 순 례(李順禮)씨는 20여년간 하던 약사 일을 그만두고 장애인 직업재활·노인의료복지시설을 비롯한 시설 운영과 봉사활동에 올인한 지 오래다. 김씨의 가장 든든한 우군인 셈이다.

기자 :전세에 살고 있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김우화 :소유개념이 많이 없어졌다. 여지껏 유·무형 자산을 합치면 100억원 정도 재단에 기증했다. 기본적인 토지와 시설 건설이 필요한 데다 노인 요양시설(봄마을)과 장애인 직업재활시설(친구마을) 등의 운영에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데 후원금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때문에 요즘도 매달 1000만~2000만원 정도를 재단에 기증하고 있다. 10여 년 전 형님을 사고사로 보내고 나서 소유의 개념이 더 없어진 것 같다. 구세군을 보면 매년 이름 없는 분들이 1억원 씩 기부하지 않나. 아주 훌륭한 일이다. 가진 사람들이 더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 공수래공수거 아닌가. 죽을 땐 누구나 빈손으로 가기 마련이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점을 잊지 않고 산다.

이순례 : 물질(돈)은 하나님이 잠시 맡겨주신 것이다. 돈을 모아서 더 큰집으로 이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흔한 아파트 분양조차 받아본 적이 없다. 자식들이 둘 있는데 집 한 채씩은 마련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시작한 것도 최근의 일이다. 그 외에 앞으로도 아파트나 집을 매입할 생각은 없다. 아마도 이 생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재단도 모두 문경시에 기부 채납했으니 공공재산이다. 우리가 죽고 없더라도 영속적으로 운영되고 지속될 수 있도록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놓는 것이 지금 목표다.
무소유의 삶에 가깝다.

어떤 철학이 있나


김) 7대3 법칙이 있다. 사회복지 사업을 하면서 스스로 세운 철학인데 내가 가진 것의 70%는 남에게 베풀고 나머지 30%는 내 위치나 내 분야에서 열심히 일해 남을 돕도록 노력한다는 것이다.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준다거나 승계에 대한 생각을 아직까지 해본 적이 없다. 딱히 물려줄 것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대신 사회복지재단을 후손에 대물림해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내가 선택한 7대 3법칙이다. 재단은 공익재단이다. 앞으로 후원자가 3000명 정도 되면 자립할 수 있을 것으로본다. 그래서 더 투명하게 경영하려 한다. 친구마을(세탁마을)의 경우 손익분기점을 지나면 지역에 희망의 횃불이 될 것으로 믿는다.

이) 20여 년간 약국을 운영하면서 나눔 활동을 해왔다. 남편 몰래 교회에 돈도 내고 6년간 적금을 모아 아이들 이름으로 시립아동병원에 기부하기도 했다. 교회에 다니면서 여러 장학금 프로젝트에도 참여한다. 미오림 복지재단에서 시설 원장으로 근무할 당시 받던 급여며 퇴직금도 모두 재단에 기부했다. 현재 상임 이사직을 맡고 있지만 역시 급여는 없다.

복지재단(나눔사업)에 올인하게 된 계기는


김) 삼성전자에서 근무하다가 91년도에 루마썬팅 코리아를 창업했다. 당시 제조업체도 갖고 있었다. 돈도 아쉬울 것 없이 벌었다. 하지만 97~98년 IMF 금융 대란 때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석 달간 환차손만 20억원에 달했다.
국세청 세무조사까지 겹쳐 견딜 재간이 없었다. 때마침 하나뿐인 형님도 사고사로 돌아가시니 앞이 캄캄하더라. 우울증까지 오더라. 절실함으로 루마필름 사업을 다시 살려내면서 베풀면서 좋은 일하면서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문경에 땅을 갖고 있었는데 지인이 복지재단 을 설립해 보라는 권유를 하더라. 그때 시작했다. 10여년간 100억원 정도 투입한 거 같다.

이) 처음엔 (복지재단 사업에) 마음속으로 반대했다. 이 사업이 (비영리사업이다 보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닌가. 사실 문경 땅에 교회 선교사 분들이나 안식년으로 한국 방문한 분들에게 주거 공간 을 마련해드리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원기도를 하고 멍청하게 앉아 있는데 마음속으로 이 일(복지사업)을 하나님이 원하시는구나 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하나님 음성처럼 들렸다. 당시 운영하던 보석상을 정리하고 복지재단에 모두 출연했다. 그 뒤로 재단 일에 올인하고 있다.

나눔 활동을 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나


김) 장애인복지시설을 혐오시설로 인식한 동네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아무 연고도 없는 타지인의 법인 신청을 받은 지자체 당국자는 이런 저런 이 유를 대며 불신의 눈초리로 까다로운 행정절차를 들이댔다. 재단을 설립하고 나서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국가지원을 받아서 장애인들을 착복 한다’ 는 신고가 접수돼 경찰관들이 출동한 적도 있었다. 주위의 지인들조차 ‘복지사업’이란 말에 의구심어 린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최고의 시 설로 인정받고 있다.

이) 초창기에 직원 구하기가 가장 어려웠다. 지방이라서 더욱 그랬다. 박봉인 데다 중풍이나 지적 장애우들과 일해야 하니 2배로 힘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재단에서라도 재원이라도 든든하게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직원들에게는 자발적 후원 외엔 절대로 후원금을 얘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비로 직원들 해외 연수나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올 해에도 유럽연수를 준비하고 있다. 직원들이 행복해야 한다고 본다. 일하고 싶은 행복한 직장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고민을 하고 준비하고 있다.


▲사진=나눔활동을 통해 삶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김우화·이순례 부부

보람이 느껴지는 때는

김) 이제 기업의 목적이 달라졌다. 누구든 봉사 활동해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지만 실천은 굉장히 어렵다.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이 아니고 룰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더욱 그러하다. 나눔 활동을 계속하다 보니 느낌이 올 때가 있다. 아이큐 40 정도 되는 장애우들과 처음엔 어울리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뽀뽀하고 매달리고 할 때 뿌듯하게 기분이 좋은느낌이 온다. 마음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어려움도 많지만 되돌아오는 행복감이 더 크다. 어르신들이 누워 계시다가 다시 걸어 다니실 때 그렇게 고맙다. 지적 장애우들의 눈동자가 변하기도 한다. 구박만 받다가 시설에서 사랑을 받아서 오는 긍정적인 변화다. 눈 마주치고 껴안고 고마워하면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게 된다. 제가 약사라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일들이 좀 더 많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김) 지금 후원자들이 1000여 명 정도다. 공익 법인이므로 자립으로 운영되게 하려면 후원자가 3000명은 돼야 한다.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고 이제 진정성을 알아주시고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시는 분위기다. 역시 시간이 필요하더라. 내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상대가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기다리는 인내심이 중요하다. 이제 희망이 보인다. 특히 재단을 가장 투명하게 운영하려고 한다. 올해에는 손익분기점을 넘을 것으로 본다.

이) 투명 경영이 우선이다. 재단에 소속된 팀장들에게 한 달에 한 번 회계보고를 하고 있다. 시설 운영하는 과정에서 얼마가 마이너스이고 재단에서 얼마 지원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내용을 상세하게 공유한다.
직원들이 재단을 믿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장이나 국장급 임원들께는 회계 공유를 한다. 전체 후원금까지 공개한다. 재단에 가족들이 전혀 관여하지 않는 것도 투명 경영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훗날 재단 인근에 약국을 운영해 마지막으로 도움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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