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담아낸 해학


[투데이코리아=노철중 기자]요즘 '열정'이라는 말을 들으면 바로 '열정페이'라는 신조어가 떠오른다. 이것은 청년 실업자 100만 명 시대에 대한 자조적인 해석이다. 기업들은 청년들에게 젊다는 이유만으로 열정을 강조하고 부당한 노동착취를 정당화시킨다. 인턴과 비정규직이라는 정부의 제도적인 뒷받침 속에서 말이다. 영화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의 홍보물들을 접했을 때 예상했던 스토리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주인공이 열정만을 강조하는 회사에 저항하면서 겪는 일들을 코믹하게 담아내는 것이었다.

5공 시절엔 총칼, 현재는 자본

그런데 그 배경이 언론사다. 비록 연예부이긴 하지만 진실을 다루고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면에서 같은 언론이다. 사실 영화 전반부에는 일반적인 신입사원들의 생활과 다를 바가 없다. 어딜 가나 나를 괴롭히는 상사가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고 입사 며칠 만에 '사직서를 써야 하나'라는 고민도 다 있을 법하다. 간부급들은 회사의 구조조정 압력에 시달리고 부서원들 밥그릇까지 챙겨야 하는 이중고를 겪는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이 영화가 언론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있음을 보여주면서 좀 더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한다. 특정 연예인이나 기획사를 '조지기' 위해서 추측성 기사를 쓰게 하고 취재원으로부터 접대를 받기도 한다. 특히 강조되는 부분은 사주가 데스크에 행사하는 압력이다. 부장 기자인 하재관(정재영 분)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5공 때는 총칼이 무서워서 눈치 봤다 치자, 지금은 돈 있는 놈들 눈치까지 봐야 하느냐"는 하소연을 한다. 사주의 논리에 데스크의 권리가 침해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만약 이 영화의 배경이 일반 대기업이었다면 홍보문구에 나왔던 대로 러블리한 소녀 감성의 박보영이 주인공인 '공감 코미디'로만 그쳤을지 모른다. 자본주의의 억압적인 노동 현실 속에서 좌충우돌하는 주인공이 로맨틱한 사랑에 빠지고 결국에는 '먹고사니즘'에 항복하게 된다는 뻔한 결말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언론이라는 특수성을 삽입함으로써 '공감 코미디'와 같은 대중적인 장르에서도 갈수록 요원해지는 '정의구현'이라는 가치실현의 문제를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가?

필자는 두 인물을 보면서 압력에 대처하는 자세에서 확연한 차이를 발견했다. 부장기자인 하재관은 끊임없는 해고의 위협 속에서 팀원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한 집안의 가장과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주와 타협도 해야 하고 자신이 악역을 맡아야 할 때도 있다. 그는 영화 <국제시장>에서 윤덕수(황정민 분)와 매우 닮아있다. 전쟁과 독재정권 그리고 경제난이라는 엄혹한 현실을 살면서 오직 가족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했던 시대적인 인물 윤덕수와 현재를 사는 하재관이 겹쳐 보이는 것이다.

도라희(박보영 분)도 부장과 같은 위협 속에서 살고 있다. 간신히 취업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박봉에 쉬는 날도 없는 수습 기간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도라희는 부장이나 윤덕수처럼 시대나 구조에 의해 함몰되지는 않는다. 기자로서 내가 쓴 하나의 기사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하고 비록 추측성 '조지기' 기사를 쓰기는 하지만 적어도 정의에 바탕을 두고 행동한다.

문제는 부장과 윤덕수는 점점 괴물이 되어갔다는 것이다. 진짜 외부에서 전체를 감싸고 있는 악의 결계가 존재하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깨지 못한다. 대신에 자기 스스로가 괴물이 되어간다. 흥미로운 것은 부장은 괴물이지만 한편으로는 한없이 희생하는 기러기 아빠다. 교육이라는 병에 걸린 대한민국의 대표 희생자이기도 하다. 결계를 뚫고 발산해야 할 열정은 자꾸 몸에 쌓이면 그것이 병으로 전이되기 마련이다. 왜 자꾸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병들어 가는가?

'말'의 미학

이 영화의 마지막은 그래서 더 의미가 있다. 사주 측의 압력으로 부장은 도라희의 기사를 도저히 내보낼 수가 없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인터넷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팀원들이 힘을 합쳐 도라희의 기사를 잘나가는 인기 게시판에 올리고 SNS를 통해 퍼트려 포털사이트 검색어에 올리는 일종의 공모를 단행한다. 정식 기사를 낼 수는 없지만, 역으로 전파를 시켜 기사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권력에 대한 반란이기도 하다.

영화평론가 이창우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서 이 영화에 대해 "청년 직장인들이 돈과 기득권과 타협과 순종에 쩔은 상사들을 골려 먹고 그러고도 천연덕스럽게 즐거워하는 영화는 더 많이 제작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의에 반대되는 부조리와 비도덕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현실(돈)에 안주하는 것이 낫다는 시대적 헤게모니에 대적할 방법은 '말'을 하는 것이다. 말은 현재로써는 힘없는 일반대중이 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다. 요즘 쉽게 볼 수 있는 '문화제'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속에서 권력을 '골려 먹고 즐거워할 수' 있다. 영화든 문화제든 이런 해학의 장이 좀 더 많아지길 바란다.


<사진설명> 위 사진은 영화포스터, 아래 사진은 영화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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