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철기 (웃음치료사 / 창녕감리교회 장로)

서울로 상경한 나는 종로3가에 있는 서울경리학원을 다니면서 대한교육보험 남부지사 외무사원으로 들어가 활동을 하였으나 그 당시 어려운 가난에 시달리고 보험가입자가 없어서 약간에 빚만 지고 귀향하여 당진 합덕에 농촌에 농사 짓는 일꾼으로 일하던 중 인천에 있는 대한중공업에 입사하여 박판공장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조부모님, 숙부모님, 동생들 12명의 식구가 사글세 30,000원에 3,000원을 내면서 방 한 칸 마루 한 칸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월급타기 전에 쌀집에서 미리 가불해 다가 12식구가 겨우 연명할 정도였고 반찬은 간장과 새우젓 뿐 야간근무를 하고 집에 와서 잠을 자야 하는데 편히 잘 수 있는 자리가 없어서 잠을 설치다가 바로 출근을 하게 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직장생활도 편한 직장이 아니라 고염수당을 받는 고열직종 박판공장 압연공으로 일하면서 한여름에 의무실로 실려 가는 동료도 많이 생겼다. 그렇게 힘든 작업에도 하루를 빠지지 않고 근무해 연.월차 수당을 받아 식구가 겨우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나이 27세가 됐을 때 친구가 중매하여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게 되면서 식구를 떠나 처가살이가 시작됐다. 돼지를 키우며 간장 장사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 나는 이를 악물고 돈을 모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그 힘든 고열작업도 묵묵히 해나갔다. 옷이라곤 회사에서 1년에 2벌 나오는 작업복을 입고 그렇게도 먹고 싶던 자장면 한번 못 먹고 돈을 모아 10년 만에 집을 사려고 했다.

하지만 덕적도에서 새우잡이를 하던 매제가 동업을 제안하고 3개월이면 본전을 건진다는 말에 새우잡이 어선 1척을 구입해 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왠 말인가! 그 때가 1970년인데 그 해부터 덕적도 해안에 새우가 잡히지 않고 결국 수년 이같은 일이 지속되자 형제간 의리만 상하고 나는 계속 남의 집을 전전긍긍하는 신세로 남게 됐다.

이렇게 되다보니 나는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보다 안되는 일이 더 많은가?'라는 회의감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는 신경성 위장병으로 병원에 계속 다니게 되었고 3남매 아이들은 폐결핵으로 막내 아이는 뇌위축증으로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아 나 스스로 세상을 원망하고 매일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가는 때가 늘어났기 시작했다.

3년이 지난 후 둘째까지는 병이 완치가 됐지만, 막내 아들은 여전히 뇌위축증을 앓고 있어서 유명하다는 병원은 다 찾아다니며 치료를 했지만 병이 악화되고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반신마비까지 오기 시작했다.

아내는 반신불수가 된 막내아들을 데리고 창녕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기도원을 다니면서 기도를 받고 새벽기도, 심야기도, 철야기도를 계속했지만 오히려 더 악화만 되어가고 가족들은 점점 지쳐만 갔다. ☞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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