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탁의도 없어도 '물증' 앞 무죄입증 불가능.. 악용 우려도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 30대 교사 A씨는 어느날 동네 친구 B와 오랜만에 만나 회식을 했다. 계산할 때 식비는 고깃값에 소주·맥주 합쳐 6만 원이 나왔다.

그런데 알고보니 B의 자녀는 A씨의 학교 학생이었다. 어느날 A씨에게는 돌연 '과태료 폭탄'이 쏟아졌다. 누군가 A씨와 B의 만남을 알고 이를 '촌지' 차원으로 해석해 신고한 것이었다.

# 현직 경제전문기자 C씨는 문중(門中) 모임에 갔다가 먼 친척과 겸상하게 됐다. 이런저런 식사비로 6만 원이 나왔는데 사실 친척은 C씨가 요즘 다루는 경제 이슈의 한복판에 연루된 기업 사장이었다.

C씨는 이것도 모르고 기사를 작성하면서 기업들을 옹호하는 듯한 내용을 넣었다가 누군가의 신고로 결국 거액의 과태료를 물게 됐다.


공직자 부정청탁과 금품수수를 금지한 이른바 '김영란법'이 28일 헌법재판소에서 합헌 결정을 받음에 따라 9월 28일부터 정식 시행에 들어가게 됐다.

하지만 '부정청탁' 등의 모호함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위 사례들처럼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식사를 제공받아 법을 위반할 경우 처벌해야 하느냐 마느냐도 논란이다.

위법(違法)이 아님을 알면서도 악의를 품은 제3자가 신고할 경우 대처할 방법이 없다. "청탁을 받아들이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해도 이를 입증할 길이 없다. 식사를 제공받은 것 자체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김영란법이 이처럼 무고한 피해가 발생할 여지를 남겨둠에 따라 교사나 기자 등 법 대상자로 지정된 직종 종사자들의 사회적 고립이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와 만나 식사만 해도 청탁으로 비춰질 우려가 있다. 옆집 이웃이 여행 중 강아지를 대신 돌봐준 것에 대한 감사로 식사 대접만 해도 "청탁 아니냐"는 의심을 살 수 있다.

김영란법이 대상자의 배우자까지도 처벌 대상으로 규정함에 따라 가족 전체의 사회적 고립도 불가피하다. 고립된 삶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불러온다. 가정 파탄이나 원치 않는 퇴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새누리당, 정의당 등 여야는 합헌 결정 후 정부의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나섰지만 법이 가지는 근본적인 결함을 개정하지 않는 한 행정부로서도 별 도리가 없다.

홀로 밥 먹는 사람을 뜻하는 '혼밥족'이 유행하는 등 안그래도 각박해져 가는 세상이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5~12일 직장인 102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73%가 "소외감을 느낀다"고 답했다. 이혼율은 나날이 높아지고 자살율은 OECD 국가 중 매번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김영란법이 향후 사회 전반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없는 한 일부에 의한 '부패'는 사라지는 대신 '사회적 고립'은 전체로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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