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3당합당의 비밀은‘승리연합 이론’따른 지분 결합...3당 합당의 원리가 지금의 정치상황에도 적용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실에서 민주당 대선 예비 후보로 등록한 안희정 충남지사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투데이코리아=김창석 기자] 안희정 충남지사가 '대연정'을 표방하고 나섰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지난 2일 "국가 운영에서 노무현 정부가 실패한 대연정, 헌법의 가치를 실천할 것"이라며 "헌법은 대연정을 하라고 만든 것"이라고 집권시 대연정을 공약했다.


안 지사는 이날 오전 더불어민주당 대선경선 예비후보 등록후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우리는 선거와 민주주의 정치 과정에서 항상 경쟁을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 원칙으로 그 누구와도 단결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안 지사는 "물론 대통령을 배출한 제1당이 원내 과반을 점하면 다르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누가 후보가 돼도 과반에 턱없이 부족하다"며 "이 상태에서 헌법 정신대로 총리를 인준받고 국무회의를 하려면 원내 과반의 다수파가 형성돼야 한다"고 대연정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헌법 정신대로 원내 다수파를 형성하도록 대연정을 꾸리는 것이 노무현 정부때 구상한 헌법 실천 방안"이라며 "그 미완의 역사를 완성할 것이다. 개헌 이전이라도 협치 정신을 구현할 유일한 길"이라고 규정했다.


안 지사는 특히 새누리당도 대연정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날 CBS라디오 인터뷰에서 '새누리당도 파트너가 될수 있느냐'는 질문에 "의회의 지도부가 누구든 공통의 국가 과제와 개혁의 과제에 합의한다면 구성할 수 있다"고 가능성을 열어놨다.


안 지사는 "기존 여야 구도에서 반대하겠다고 하는 야당을 상존시켜서는 의회가 작동하지 않는다"며 "가장 반대 진영의 사람들과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함께 국가의 목표를 합의해야만 시대적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새누리당은 무조건 야당하라는 자세는 안된다는 얘기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했다.


4일 정가에 따르면 안지사의 '대연정' 제안은 과거 통일민주당 김영삼 대표가 민정당 대표로 들어가 민정당의 노태우와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과 3당합당을 이뤄 민자당을 창당하고 결국 대통령에 성공했던 방식과 비교될만한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안 지사는 대선주자 중 반기문표 최대 수혜자로 최근 두자리 수 지지율을 달성, 문재인에 이어 2위로 급부상했다. 이런 지지세를 바탕으로 여야 통합 '대연정'을 제안하고 나섰다. 안지사가 중심이 된 '대연정'과 6공 당시 3당합당 후 탄생한 '민자당'식 성공 원리를 비교해 살펴보면 현재의 난국을 돌파 할 수 있는 해법이 도출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과거 6공 탄생 시점으로 잠시 되돌아 가 현재 정국과 비교해 보면 안희정의 '대연정' 제안에 여야가 머리를 맞댈 이유가 분명해진다. 김재한 한림대 정치학 교수가 지난해 1월 24일 중앙선데이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당시의 상황은 한마디로 야권분열과 대권경쟁이 치열했다.노태우의 6.29 선언 이후 여야는 실질적으로 대권경쟁에 돌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여권은 지난 6.10 대회에서 노태우 후보를 옹립함으로써, 제 5공화국에 이은 또 한번의 신군부세력에 의한 재집권을 시도했다.


당시 국민적 관심사는 전통야당 출신인 김영삼-김대중의 후보단일화로서, 단일화 만이 6월항쟁의 보답이었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실현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양김씨들의 경쟁과 서로의 양보만을 요구한 끝에 야권 단일화는 결렬되었고, 각 김씨들은 대통령 후보 출마를 공식선언하였다.


야권의 분열은 집권여당의 바람이며 민정당의 승리로 보였다. 야권분열은 6월항쟁 과정에서 보여진 범야세력의 단결과 후보단일화에 의한 평화적 정권 교체, 군정종식은 그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다. 야권의 분열 요인은 몇 가지 측면의 갈등에 기인한다.


첫째, 양김 중 일인이 양보할 경우 정치적 생명의 좌절과 실패에 대한 염려에서 파생된 개인적, 파당적 투쟁


둘째, 역대정권의 정치 경제적 지역적 불평등 구조의 소산인 지역갈등(영남 대 호남)


셋째, 군사권위주의 세력와 민주화 세력간의 오래된 앙금의 결과인 반민주 대 민주의 갈등


넷째, 단일화가 최선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차선으로 양김은 당선을 확고히 주장하는 여유를 지니었다.


제 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지역갈등이 노골화되고 군정종식을 외치면서 치열한 접전을 보여 주었다. 이 선거의 결과 민정당의 노태우후보가 36.6%, 통일민주당의 김영삼후보가 28%, 평화민주당의 김대중후보가 27%,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후보가 8.1%의 득표율을 획득한 결과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 선거결과의 성격은 몇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야당의 패배를 의미했다. 둘째,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의 가능성 무산이다. 셋째, 지역감정의 양산이다. 넷째, 부정선거의 답습이었다.


1988년 2월 25일 13대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됨에 따라 제 6공화국이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노태우 정권의 수립은 민주화 운동세력에게 패배를 안겨 주었다. 민주화 운동세력의 분열과 야댱의 분열로 정권의 평화적 교체가 무산된 것이다.


1988년 4월26일 총선은 지역구와 전국구 의석을 합쳐 전체의석 299명 가운데 야당인 평민당 71석, 민주당 59석, 공화당 35석을 차지하여, 집권당인 민정당이 125석으로 과반수에 24석이 미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야당의 의석을 합치면 여소야대를 돌파할 수 있다는 명분을 가져다 준 계기였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3당합당을 공동발표하고 있다. 이들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3자회담을 갖고 보수 3당이 주축이 되어 중도 민주세력을 총집결 시키는 대연합을 이루기로 하는 합당선언문을 채택했다.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인 1990년 1월 24일 민주자유당(이하 민자당) 통합추진위원회가 출범했다. 그 나흘 전인 1월 20일 비밀리에 9개항의 합당 각서가 작성됐고, 22일 오전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 겸 민주정의당(이하 민정당) 총재, 김영삼 통일민주당(이하 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이하 공화당) 총재가 모여 9시간 동안의 회동을 가진 이후 합당을 선언했다. 이른바 3당합당이다.


3당합당 직전 평화민주당(이하 평민당)·민주당·민정당·공화당의 의석비는 각각 24%, 20%, 43%, 12%였다. 내각제 개헌을 전제로 하는 ⅔ 이상 연합은 ①평민+민주+민정+공화(99%) ②평민+민주+민정(87%) ③평민+민정+공화(79%) ④평민+민정(67%) ⑤민주+민정+공화(75%)의 5가지다. 평민+민주+민정은 민주가 빠져도 ⅔ 승리연합이 유지된다. 평민+민정+공화는 공화가 없어도 ⅔ 승리연합이다. 즉 한 정당이라도 빠지면 ⅔ 연합이 되지 않는 최소승리연합(MWC)은 평민+민정 그리고 민주+민정+공화뿐이다. 당시 민정당은 실제로 이 두 가지를 각각 추진했다.


3당합당 직전 한국 정당들의 이념적 입장은 좌에서 우로 평민당-민주당-민정당-공화당의 순서였다. 이는 여러 설문조사들로 확인된다. 승리연합이 될 때까지 더 유사한 정당부터 차례로 끌어들이는 ⅔ 이상 최소연결승리연합(MCWC)은 평민+민주+민정 그리고 민주+민정+공화, 이 2가지뿐이다. 평민+민주+민정의 경우, 평민당이나 민정당이 빠지면 ⅔ 승리연합이 되지 않고, 민주당이 빠지면 연결연합이 되지 않는다. 민주+민정+공화도 누가 빠지면 승리나 연결이 되지 않는 MCWC이다. 27년 전 일어난 민주+민정+공화의 합당은 MWC 이론과 MCWC 이론이 공통으로 예측한 구성 그대로다.


민정당, 평민+민정 연합도 추진이전 민자당 내 세 계파의 지분을 살펴보자. 합당 직후 민주계는 민정·민주·공화 간 당무회의 구성비를 9:7:4로 이미 합의했으니 그렇게 분배할 것을 요구했다. 이 분배방식에 민정계는 반발했다. 실제 이 분배 비는 이탈한 구성원을 응징할 수 없는 취약한 방식이었다. 만일 민정계가 평민당과 새로운 연합을 구성하여 각각 10씩 갖는다면, 민주계는 자신이 받기로 한 7을 유지한 채 새로운 대응 연합을 구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민자당은 자당에게 배정된 12개 국회 상임위원장 자리를 민정·민주·공화의 세 계파에게 6:4:2로 분배했다. 또 사무처·정책위·의원실 등의 국장 및 부장급 인선을 5:3:2로, 시·도 지부장 인선을 7:4:3으로 분배했다.


3당합당 후의 승리연합이 민정+민주+공화, 민정+평민, 평민+민주+공화 이 3가지만 가능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는 내각제 개헌과 거대 여당에 대한 부정적인 국민 여론에서 만든 전제다. 만일 민정계가 50%+α의 지분을 원하여 평민당에게 50%-α를 주는 새로운 연대를 추구한다면, 민주+공화는 평민당에게 50%를 주는 대응 연합을 구성하여 민정계를 응징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공화가 50%+α를 갖기 위해 평민당에게 50%-α를 제공하는 연대 또한 민정계의 역공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7:4:3, 6:4:2, 5:3:2 등의 분배 비처럼 민정계가 전체의 50%에 달하는 지분을 갖는 것은 9:7:4의 경우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민자당은 5~6년을 버텼다.


승리연합의 기여도를 놓고 보자면 민주계와 공화계는 같은 영향력을 갖는다. 즉 민주계와 공화계는 동일한 지분을 갖는 것이 안정적인 배분 방식이다. 민주계보다 배분을 훨씬 적게 받은 공화계는 결국 95년 2월 민자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합당으로 75%에 달하는 의석을 갖게 된 민자당은 2년 후 실시된 9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49.8%라는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신한국당으로 개명하여 참가한 9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46.5%의 의석을 얻었다. A+B+C는 A, B, C 각각의 의석을 합한 의석 수를 유지하지 못했다. 3당합당은 선거 승리가 아니라, 국회 장악을 위한 연대였을 뿐이다. 민자당은 비교적 효과적인 배분으로 연대 유지에 성공했지만 다음 선거에서 의석을 대폭 축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선거 직후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관찰되는 연립내각과 달리, 국회의원 선거 직전의 분당·연대·합당의 주 목적은 선거 당선자를 많이 내는 것이다. 물론 함께 할 수 없는 정파가 있다면 그것도 감안해야 한다.


2014년 3월 안철수 의원의 새정치연합과 민주당이 합당하여 새정치민주연합을 창당했다. 126석의 민주당과 2석의 새정치연합이 지분을 5대5 정신으로 한다고 했다. 그러다가 자신의 뜻이 새정치민주연합에서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안 의원은 2015년 12월 탈당했고 지금 국민의당을 창당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도 당명을 더불어민주당으로 변경했다. A+B가 분리 후 각자도생하여 얻은 A와 B의 의석 수 합이 분리 전 A+B의 의석 수보다 더 클지 아니면 더 작을지는 각 정파가 앞으로 대응하기 나름이다.


‘야당 분열=여당 이익’ 아닐 수도 있다. 선거 판의 지지율→득표율→의석비 등의 전환에서 정치권의 희비가 엇갈린다. 유권자는 자신의 가치에 가장 가까운 정파를 지지하지만, 자신의 표가 사표(死票)가 되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영향력 있는 정파를 골라 투표한다. 또 소선거구제에서는 의석비가 득표율 그대로 되지 않는다. 이런 전환 과정이 있기 때문에 전략적 여지는 더욱 크다.


3년 전 문재인과 등을 돌린 안철수의 야권 분열은 기존의 양당 경쟁과 어떤 차이를 가져다 줄까. 먼저 지지율→득표율 단계에서, 야권 분열로 인한 야권에 대한 실망에서 오는 반사이익 말고는 새누리당의 지지율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기존 양당 체제에서 상대적으로 새누리당을 가깝게 느끼던 유권자 일부에게 더 가깝게 다가간 제3의 정당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조건이 동일하다면, 2개 정당과 경쟁하는 선거 상황에서의 득표율과 의석비는 1개 정당과 경쟁하는 선거 상황보다 불리하다. 또 야당들은 사표 방지 심리의 야 성향 표를 얻기 위해 세를 과시할 수밖에 없다. 외부 영입이 그런 예다.


득표율→의석비 단계에서는 야 성향 유권자의 표가 여러 야당 후보에 분산되는 선거구에서 새누리당 후보가 낮은 득표율로 당선될 가능성이 커졌다. 각 정파는 이런 효과들을 고려하여 선거 대진표를 짤 수 있을 것이다.


불안정한 정당 체제는 한국 정치의 일상이 되었다. 정파 간 연대가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줄 것이고 또 선거 결과에 따라 새로운 연대가 추진될 것이다. 안희정이 추구하는 '대연정'에 안철수,이재명 등 군소 후보가 총 결집하여 연대가 완성되면 그 연대는 4~5월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다시 변화를 겪을 것이다. 꼭 민자당식 3당합당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연대의 원리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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