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 부석사, 무섬마을로 힐링하러 떠나요”

▲무섬마을

[투데이코리아=최치선 기자] 2017년 새해를 맞아 한글세계화운동연합(회장: 오양심)에서는 숙수사(주지: 종정 백재 스님)와 함께 대한민국 문화유산 답사(제1회 영주편)를 시작한다. 두 단체는 세계 으뜸글로 손색이 없는 한글의 세계화를 위해 우리 역사와 전통문화를 배우고 이해하는 답사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오는 2월 18일부터 19일까지 1박2일간 진행되는 답사는 영주 숙수사 절터에 세워진 소수서원을 중심으로 한 영주문화유산이다.

이번 답사에서는 유교부흥정책에 희생된 신라고찰 숙수사재건의 필요성을 살펴보고 소수서원, 소수박물관, 금성대군신단, 선비촌, 선비수련원, 숙수사, 순흥도호부, 무섬전통마을, 부석사 등 영주와 풍기 일원의 유적 및 문화유산을 둘러본다.

영주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지인 ‘무섬마을’과 유교의 산실 ‘소수서원’ 등 선비코스는 지난 12월 28일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에 뽑혔다.

이번 영주문화유산답사 참가자 접수는 2월 15일까지이며 자세한 문의는 행사진행을 주관하는 트래블아이(www.traveli.net)로 하면 된다.


●유교의 산실, 소수서원과 선비촌

▲소수서원과 선비촌 일대는 방송과 영화에서 사극의 주요 촬영지가 되고 있다.(사진=최치선 기자)

▲선비촌

지금의 영주시는 옛 영풍군이 위치했던 지역으로 영천군(榮川郡)·풍기군(豊基郡)·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가 합해 이루어진 곳이다. 영풍은 영천과 풍기의 머리글자를 따 이름 지어졌다. 영주문화유산답사의 시작은 순흥도호부가 있던 조선시대 최초의 사립대학인 소수서원에서 출발한다.

현재의 소수서원이 위치한 자리는 원래 숙수사가 세워져 있던 곳이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서원 입구에는 4m 높이의 당간지주가 남아있어 숙수사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수많은 선비들을 배출한 학문의 전당이자 선비의 고장 영주를 탄생시킨 곳이다.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져버린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데서 온 말이었다.

조선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민족교육의 산실로 퇴계 선생의 제자를 포함해 4000여 명의 유생을 길러냈으며, 오는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다.

소수서원과 연계되어 있는 선비촌은 해우당, 김문기 가옥 등 기와집 7채와 두암고택 가람집 등 초가집이 들어서 있는 곳으로 선비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오감 체험형 전시와 참여형 이벤트, 전통문화 체험의 기회가 수시로 제공된다.

또 인근에 위치한 선비문화수련원에서는 매년 선비정신을 배우고 체험하기 위한 학생들과 직장, 단체의 방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소수박물관 - 국내 유일의 유교박물관 체험

▲ 소수박물관 내에 전시된 숙수사 유물 중 용두

소수박물관은 유교와 관련된 전통문화 유산을 체계화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유교의 이상을 간직한 소수서원을 통해 민족정신의 뿌리를 찾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이곳은 조선유학의 메카답게 서원과 관련한 귀중한 문화유산과 유학의 전망를 눈으로 체험해 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유교박물관이다. 소수박물관은 2004년 9월 22일 개관을 시작으로 영주의 귀중한 유물과 유적을 체계적으로 보존·전시 중이다. 지역문화의 활성화와 생동감 있는 역사 체험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부석사 - 화엄경의 질서와 세계관 체험하는 시간여행

▲ 부석사 5층석탑

부석사는 영주시 소백산 국립공원의 봉황산에 위치한 화엄종 사찰로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우리나라 10대 사찰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을 비롯해 조사당(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 벽화(국보 제46호),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 등 국보 5점, 보물 6점, 도 유형문화재 2점 등 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나 흥교사로도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공민왕 21년(1372년)에 주지가 된 원응국사(圓應國師)에 의해 크게 증축되었다.

엄격한 양식을 가졌던 삼국시대의 평지가람과 달리 산지가람이며, 보다 더 자유로운 건물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와 조선시대로 갈수록 점점 심해진다. 회전문, 범종각, 법당, 안양문, 무량수전의 차례로 이루어지는 공간 구조는 화엄경의 질서와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부석사는 전성기의 모습이 아니다. 문헌과 그림등에 나온 과거의 가람 구조가 현재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1840년에 발간된 ‘순흥읍지’에는 10세기 중반 부석사의 모습이 적혀있는데 지금은 없어진 건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높은 연대적 의미와 가치를 지녀 지난 2013년 12월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산사로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됐다.

부석사와 소백산은 지난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한 한국인이 좋아하고 꼭 가봐야 할 국내 대표 관광지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무량수전 - 수준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목조 건축물

부석사에는 몇 안 되는 고려 시대 건축물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이 유명하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 중기의 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무량수전은 조선시대 건물과 비슷해보이면서도 다른 점이 눈에 띈다. 우선 창호의 배치가 다르다. 원래 고대 건축인 삼국시대 건물에는 창호가 없었다. 당시에는 종이(한지)는 매우 소량 생산되던 것으로, 그 자체가 매우 비싼 귀중품이었기 때문에 창에다가 종이를 붙이는 것은 매우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천이나 대나무 발 등으로 막아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세인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야 창호란 단어와 함께 종이를 창문에 붙이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이 무량수전의 창호의 그 당시로써는 꽤 최신식이며, 고급스러운 장치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창호의 살 형태도 가장 기초적인 정자살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또 한가지 사실은 무량수전이 원래 입식용 건축이었다는 것이다. 현재 무량수전 실내에 있는 나무 바닥 아래에는 원래 녹색의 유약을 칠한 벽돌인 녹유전이 깔린 바닥이 있다. 즉, 고려시대에는 마치 중국의 건축물처럼 사람이 신발을 신고서서 지내는 입식생활이 일반적이었고, 무량수전 역시 그러했다는 것이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온돌 등 때문에 좌식생활이 일반화되고, 절에서는 엎드려서 절을 하는 것이 널리 퍼지자 새로 나무 바닥을 깔게 된 것이다. 부석사 안의 박물관(유물관)에 녹유전을 재현해 놓았다. 녹유전은 유리같이 광택이 뛰어나며, 이는 불국토의 수미산 바닥이 유리로 되어있다는 말을 형상화 한 것이다.

●국립산림치유원-자연이 만든 치유와 힐링의 공간

▲ 국립산림치유원

국립산림치유원은 영주시 봉현면과 옥녀봉 일대 건립된 국가 산림치유 시설로, 다양한 시설과 프로그램을 마련해 지난 10월부터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산림치유 국가 시설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 국립산림치유원은 1480억원을 투입해 건강증진센터를 비롯해 水치유센터, 산림치유센터, 치유정원, 치유숲길 등을 조성했으며, 산림치유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숲을 통한 심신안정과 건강증진 기회를 제공하는 치유와 힐링의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금성대군신단 - 단종 복위 위해 희생된 금성대군과 순절한 의사를 기리는 제단

▲ 금성대군신단 (사진=문화재청 제공)

영주 금성대군 신단(사적 제491호)은 조선 세조 때 단종임금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무참히 화를 입은 금성대군(錦城大君:이름 瑜, 세종임금의 여섯째 아들,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의 넷째동생)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및 그 일에 연루되어 순절한 의사들을 제사 드리는 곳이다. 이곳에 가면 왕권찬탈을 위해 피로 얼룩진 조선의 역사를 엿보게 될지도 모른다.

●숙수사 - 유교정책에 희생된 비운의 고찰

▲ 숙수사절터(현 소수서원)에서 발굴된 숙수사 유물.

숙수사는 현재의 소수서원에 세워졌던 절로 1300년 경 폐사된 통일신라 고찰이다.

이후 방치된 숙수사는 1967년 출가한 백재 주지스님께서 그곳 고승의 은덕을 갚기 위해 영주시 순흥면 청구리 487-1번지에 2009년부터 현재까지 복원하고 있는 중이다.

백재스님은 불교에 입문하기 전부터 청송교도소 및 여러 교도소에서 38년 동안 교화활동을 했으며, 현재는 안동교도소의 교도복지를 위하여 매월 첫째 주 수요일 방문하여 수감자들을 교화하고 있다.

지역 활동으로는 지역환경시설 현대화를 위해 경북도청을 한옥으로 건설할 것을 제안했고, 농촌지역민들의 건강을 위하여 황토방 쑥뜸 방을 만들어 놓고, 무료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스님들과 신도를 봉사자로 운영하고 있으며, 휴식 후에는 건강을 회복한 사례가 많아, 더 많은 지역민들이 쉴 수 있도록 시설확충 계획 중이다.

백재스님은 지신행전(智信行傳)인 바로알고, 바로 믿고, 바로행동하고, 바로전하는 육체건강, 정신치료에 도움을 주고 있다.

●숙수사지 - 소수서원의 천덕꾸러기가 된 숙수사 유물들

▲ 숙수사절터(현 소수서원)에서 발굴된 숙수사 유물

소수서원에 세워졌던 숙수사는 아직도 언제 세워졌는지 그리고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고 있다. 출토유물을 통해 통일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기록으로나마 숙수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경남 산청 지곡사 진관선사비(981년(경종6년))에는 “정종(定宗) 문명대왕(文明大王)이 흥주(興州) 숙수선원(宿水禪院)에 주지(住持)하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선사는 사생(四生)들에게 약석(藥石)을 베풀어 모두에게 치료하기 어려운 침아병(沉痾病)을 낫게 하였으며 육로(六路)에 다리를 놓아 모두 정도(正道)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전한다.

숙수사의 폐사 원인에 대해 고려 고종때 몽고의 침략을 드는 경우도 있지만 안향(1243~1306)이 어린 시절 수학했고 훗날 아들과 손자인 안목(1360년 卒)도 숙수사에서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1231년 시작된 몽고침략 이후에도 사찰이 존속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숙수사는 언제 폐사가 되었을까. 숙수사는 현재까지의 문헌자료를 토대로 폐사연대를 추정해본 결과 1358년 부석사 무량수전이 적병화(敵兵火:倭寇)로 소실될 당시에 함께 폐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1543년 주세붕이 백운동서원(퇴계 이황이 소수서원으로 만듬)을 세울 당시 이미 숙수사는 폐사가 된 상태였다.

이후 숙수사는 앞서 소개했듯이 800년 가까이 방치되어 오다가 백재 스님에 의해 재건되고 있다. 하지만 눈으로 보여지는 숙수사의 유물은 지금도 정부의 손을 벗어나 있다.

당간지주만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나머지 숙수사의 석조유물들은 여전히 소수서원 곳곳에 제멋대로 방치된 상태다.

서원내부를 둘러보다 보면 목탑의 심초석과 둥근 원형 안에 사각형의 찰주공을 볼 수 있다. 아마도 그곳이 숙수사의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더 훼손되기 전에 발굴과 보존이 시급하다.

지금은 소수서원이 역사적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여기는 엄연히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소수서원만 문화재가 아니라 그 땅에 원래부터 있던 숙수사의 모든 흔적들 또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문화재청과 관계기관의 대책마련이 시급해 보인다.

●수도리 전통마을(영주 무섬마을): 느림의 미학과 수백 년 전통이 오롯이 남은 집성촌

▲ 무섬마을

3면이 물 위에 둘러싸인 섬이라 하여 ‘무섬마을’이다. 형상이 마치 물 위에 뜬 연꽃모양을 닮은 무섬마을은 우리나라의 민속 마을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으로, 2013년 중요 민속문화재로 지정됐으며 2015년에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과 한국 관광의 별에 선정되기도 했다.

강 건너 3면을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과 서천이 휘돌아 흐르며 섬처럼 보이는 무섬마을은 아름다운 경치는 물론 마을의 대표 상징물인 외나무다리로 고즈넉한 전통 풍경을 만들어 낸다.

외나무다리는 1983년 콘크리트 다리가 생길 때까지 3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바깥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였으며 현재까지도 예전 모습 그대로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 무섬 외나무다리

제법 넓은 백사장과 얕은 강물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다보면 각종 드라마와 광고, 영화 촬영지로 선택된 이유를 알게 된다. 그만큼 운치 있는 풍경에 빠져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역사가 100년이 훌쩍 넘는 가옥이 16채나 남아있어 조상들의 자취와 숨결을 그대로 느껴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해우당(도 민속자료 제92호)과 만죽재(도 민속자료 제93호)는 옛 선비들의 단아한 격식이 느껴지는 고택이다. 특히 경북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인 ‘ㅁ’자형 전통가옥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수도리 전통마을로 불리던 이 곳은 반남(潘南) 박씨인 휘(諱) 수가 처음 터를 잡은 후 선성(宣城) 김씨가 들어와 박씨 문중과 혼인하면서 현재까지 두 집안의 집성촌으로 남아있다. 지금은 박씨보다 김씨가 더 많다.

안동 하회마을을 연상시키는 이 마을에서 꼭 해봐야 할 체험은 바로 무섬 외나무다리를 건너보는 것이다.

잔잔한 강물 위에 세워진 무섬외나무다리를 천천히 걷다보면 어른들은 동심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을 만큼 폭이 좁은 나무다리 중간 중간에는 건너편에서 오는 사람을 피해 자리를 내줄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외나무다리는 중심을 잡으며 걸어야 되기 때문에 느림의 미학을 체험하게 되고 발아래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자연과의 일체감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유유히 흐르는 강과 정겨운 자연 속에 고풍스러운 옛집이 즐비한 수도리는 고향을 찾는 편안한 마음으로 다녀오기에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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