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長燁 "北核, 50년대부터 개발 시작" 증언.. 2000년대 들어 급진전

▲ 히로시마 원폭 부상자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잊혀지지 않는 불길(the unforgettable fire)'.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廣島) 상공 580m에서 폭발한 인류역사상 첫 원자폭탄 '리틀보이(little boy)'가 낳은 참상을 그린 아일랜드 록그룹 U-2의 곡명이다.


원폭이 보여준 위력은 충격 그 자체였다. 태양보다 밝게 빛나는 섬광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무려 7만여 구의 시신이 즐비했다. 화염에 휩싸여 그 자리에서 '증발'한 희생자, 후폭풍에 휩쓸려 사망한 희생자, 낙진(落塵. 폭발 충격으로 하늘로 떠올랐다가 떨어지는 잔해)에 맞아 사망한 희생자까지.


피해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거대한 불길은 방사능이라는 보이지 않는 죽음의 손길을 뻗었다. 전후(戰後)에도 수만 명이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목숨을 잃었다. 히로시마 당시 인구(약 25만 명)의 절반에 달하는 사람들이 원폭 한 발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


그리고 21세기 오늘 날, 핵무기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다. 위력만 커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품'이 되어 많은 나라로 퍼져나갔다. 북한도 예외는 아니다.


북한이 작년 9월 9일 함경북도 풍계리 핵실험장에서 실시한 5차 핵실험 위력은 추정치로 10kt. 히로시마 원폭 위력(15kt)에는 못 미치지만 북핵(北核) 폭발 시 나올 추정 희생자 수로 따지면 얘기는 달라진다.


위력이 낮든 적든 핵무기는 핵무기이기에 최소 수만~십수만 명의 사망자 발생은 이미 예약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늘 날의 서울, 부산, 울산 등 대도시는 히로시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구 밀도가 대단히 높다. 게다가 북한이 미국·중국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기 위해, 즉 '단계적으로' 자극하기 위해 위력을 축소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북한이 이토록 '금단(禁斷)의 힘'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북핵 개발사(史)부터 알 필요가 있다.


황장엽 선생(1923.2.17~2010.10.10). 이른바 북한 '혁명 1세대'로서 김일성종합대(약칭 김대) 총장, 최고인민회의(국회 격) 상임위원장, 그리고 실세 중의 실세인 노동당 비서까지 역임한 '김일성의 오른팔' 출신이다.


북한 지도이념인 주체사상을 만든 인물이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김일성은 이 주체사상을 '악용'해 자신의 1인 독재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 아들(김정일)과 손자(김정은)에게까지 이어지는 혈통세습의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1997년 돌연 중국 출장길 도중 한국에 망명했다. 혈통세습으로 최고권력을 이어받은 김정일은 자신의 김대 스승이기도 한 황장엽 탈북에 극도로 격분해 중국 내 '암살조'를 모조리 투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과의 극단적인 외교적 충돌을 우려해 '제3국에 추방하는 형태'로 사실상 그의 망명을 허용했다. 그리고 2007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그가 본 기자에게 매주 서울 여의도·강남 안가(安家)에서 들려준 북한의 내막은 충격적이었다.


▲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김포공항 입국 당시 "나는 민족 앞에 큰 죄를 지었다"고 사죄했다.


"북한 수소 핵융합 반응 기술 확보, 충분히 가능하다"


수소 핵융합 반응은 수소폭탄에 쓰이는 기술이다. "충분히 가능하다" 황장엽 선생의 이 한마디에서 드러난 북한의 핵에 대한 '집착' 역사는 멀리 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주지(周知)하다시피 첫 원폭 개발에 성공한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은 당대 최고의 핵기술자들을 대거 영입해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s)에서 극비리에 핵무기를 연구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 1904~1967) 박사가 개발을 이끈 대표적 인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비에트연방(소련), 영국, 프랑스 등 당시 강대국들이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나치 독일 기술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대가로 비밀리에 끌어들였다.


특히 소련은 미국 내 공산주의자들을 매수하기도 했다. 그중에는 핵물리학자들도 포함됐다. 미국을 위해 일하면서 동시에 소련에 충성한 스파이 클라우스 푹스(Klaus Fuchs) 박사가 대표적이다.


소련의 핵개발은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진전됐다. 미국이 히로시마 원폭을 투하한지 약 4년만인 1949년 8월 29일 카자흐스탄 세미팔라틴스크(Semipalatinsk) 실험장에서 22kt 위력의 핵실험에 성공했다.


다시 4년 뒤인 53년 8월 12일에는 수소폭탄 개발에도 성공했다. 61년에는 '차르 봄바(Tsar Bomba)'라는 이름의, 오늘날조차도 금기시되는 50Mt(메가톤) 위력의 수소폭탄 실험을 감행하기도 했다.


소련에 의해 소련의 위성국 개념으로 세워진 북한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더구나 북한은 6.25전쟁 과정에서 소련의 기만성(유엔군 참전 결의안 표결 기권)을 똑똑히 목격했기에, 그리고 한반도 적화(赤化)라는 몽상(夢想)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주체 조선' 방침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핵무기는 같은 동맹국끼리도 공유할 수 없는 그런 성질의 존재였다. 미국같은 경우만 해도 1946년 맥마흔법(McMahon Act)을 통과시키고 영국, 프랑스로의 핵기술 이전을 원천차단했다.


영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 탈퇴 협박과 갖은 첩보전 끝에, 프랑스는 서독과의 비밀협상 등을 통해 기어이 핵무기를 보유했다.


소련도 미국과 마찬가지라서 북한 등 동맹국으로의 기술 이전을 거부했다. 중국은 국공(國共)내전 이전인 중화민국(대만) 시절부터 미국에서 유학한 자국계 핵기술자들, 그리고 물량공세인 '인해(人海)첩보'를 통해 끝내 1964년 핵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북한은 이마저도 바랄 수 없었다.


결국 북한은 80년대까지 약 30년 간 '핵 불모지' 시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집착까지 꺾인 것은 아니었다. 80년대 말~90년대 들어 핵무기가 강대국들의 전유물이 아닌 '상품화'되기 시작하면서 북한은 핵기술을 본격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파키스탄 핵개발의 아버지'로 불리는 압둘 카디르 칸(Abdul Qadeer Khan) 박사, 그리고 1991년 12월 26일 소련 붕괴로 인해 졸지에 나라를 잃은 실업자가 돼 '재취업'에 나선 소련 핵기술자와 군인들이 국제 핵확산에 '기여'한 인물들로 손꼽힌다.


특히 소련 핵기술자들은 북핵 개발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차 북핵위기(93년 3월 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가 소련 붕괴 후 불과 약 2년만에 벌어졌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황장엽 선생에 의하면 1차 북핵위기 때 북한은 전병호 당시 노동당 군수공업부장 주도 하에 콘크리트, 모래 등을 동원해 핵시설 방사능 유출을 막으려 했다. 미국이 알게 되면 '물리적 저지'에 나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핵위기가 발생하자 클린턴 행정부는 영변원자로 폭격 실시 직전까지 간 바 있다.


90년대 핵기술 기본을 다진 북한은 2000년대 들어 '물 만난 고기'가 된다. 노무현 정부 인사들은 책임론을 강력부인하지만 1차 핵실험(2006년 10월 9일)이 참여정부 시절 일어났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황장엽 선생도 생전에 이 점을 늘 한탄했다.


급기야는 북한이 2010년대 들어 핵탄두 소형화 및 대기권 재돌입 기술을 확보하는 한편 위력 증강에도 성공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화살(핵탄두)을 쏘기 위한 활 역할을 하는 탄도미사일 개발도 잠수함발사탄도탄(SLBM) 시험 등을 통해 급진전을 이루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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