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의 숨겨진 아들이 있다면? 이런 설정에서 이 소설은 시작한다.

영국인 역사학자 켈소 박사는 공산주의 역사를 연구하지만, 학계의 중심에서는 조금 밀려난 인물이다. 유명대학에 교수 자리를 잡은 것도 아니고, 돈이 많이 생기는 연구 영역도 아니며, 연구 주제는 아직도 소련 시절의 권위주의와 비밀주의에 찌들어 있는 러시아인들 때문에 접근조차 어려운 경우가 더 많다.

그런 그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온 걸까?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했던 그는 늙은 전직 KGB 요원에게서 “숨겨진 스탈린의 노트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엄청난 사료 가치가 있을 메모장 이야기에 혹한 켈소 박사, 그리고 이를 눈치채고 달라붙은 미국인 기자 오브라이언은 이 노트를 찾아 동분서주하는데, 그러나 이 메모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건 이들만이 아니었으니, 이 노트를 이용해 공산주의를 부활시키려는 마만토프라는 퇴직 KGB 간부와, 러시아 국익을 위해 노트를 추적하는 정보기관 FSB(KGB의 후신)의 직원들이 복잡하게 얽힌다.

노트의 내용을 확인한 주인공 일행은 스탈린의 '숨겨진 아들'이 살아있음을 확인한 뒤 경악하고, 이때부터 이 아들을 이용해 보려는 등장인물들이 각자 두뇌게임을 펼친다. 이러면서 일은 점차 눈덩이처럼 커져 존재하지 않았던 듯 살던 스탈린의 아들은 어느 새 러시아를 바꿀 재앙으로 부풀려지는데......

이렇게 각자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아크엔젤'로 여행하는 줄거리가 작가의 촘촘한 이야기 전개에 따라 숨가쁘게 펼쳐진다. 작가 로버트 해리스는 자신의 데뷔작 '그들의 조국'에서처럼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실상은 한물간 존재로 취급받는 인물을 내세워 거대한 음모에 맞서싸우도록 구조를 짜 놓았다(데뷔작에서는 사상을 의심받는 나치시대의 경찰관, 이번 작품에서는 인기없는 학자). 가장 가까이서 사실을 의논하던 친구(기자)가 사실은 주인공을 배신한다는 구조도 데뷔작에서 같은 경찰관의 정보누설로 곤란을 겪는 것과 유사하다. 여자가 엮여들고, 그 여자가 사건해결에 큰 역할을 하는 것도 작품마다 반복되는 코드인 것 같다. 그러나 이번 '아크엔젤'이 데뷔작에 비해 한층 세련된 구조를 갖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욕망에 충실하도록 스토리를 풀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학자의 양심 운운하지만 사실은 3류 잡지와 연계돼 쇼킹한 논문 주제를 찾아 헤매는 주인공 켈소 박사는 그가 앙앙불락하는 기자 오브라이언과 실상 다를 것도 더 우월할 것도 없는 존재다. 공산주의의 지나간 영광을 되뇌이는 러시아인들 대부분은 돈에 쉽게 매수되는 인물로 묘사된다. 전직 정보기관원이나, 현직 정보기관원이나 대부분 국익보다는 개인의 출세나 이념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펠릭스라는 정보원은 거의 유일하게 러시아의 국익에만 관심이 있는 청백리이지만, 결국 얼어붙은 겨울숲 한 가운데 방치된다.

모두가 나름의 '특종거리'를 찾아 달리는 가운데, 낡은 노트에 담겨 있던 그저 “스탈린을 경배하던 한 시골처녀가 스탈린의 아이를 임신했다”라는 내용은 “위대한 스탈린 동지의 아들이 나타났다. 그 분을 경배하라”라는 것, 더 나아가 그를 지도자로 추대하자는 '구소련의 부활'이라는 엉뚱한 방향으로까지 부풀어 오른다. 이 와중에 오브라이언으로 대변되는 서방 언론의 '치고 나가기', 내지는 '아니면 말고'식 보도 행태가 한몫을 함은 물론이다.

지난 해 대선에서 BBK 사건을 겪은 우리로서는 이런 스토리 보드에 익숙해서 한결 이해가 빠르고 몰입하기가 쉽다. 모두가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만 보고, 또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만 이야기한 BBK 사건과 이 소설의 구조도는 어찌나 닮았는지. 더욱이 언론이 논란 만들기에 한몫을 한 BBK 논란과도 겹쳐 시사하는 바도 크다. 또 '아크엔젤'은 BBK처럼 복잡한 그림을 그리지 않고도 스탈린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쇼킹한 주제를 다루니 머리 아프지 않아서 더 좋다.

더욱이 1년간 한국 전체를 뒤흔들며 끝없이 부풀어 올랐던 BBK 사건이 검찰의 발표 이후 한 순간에 푹 가라앉아 시들해진 것처럼, 이 소설 역시 결말에 “허, 참”하는 소리가 절로 날 정도로 허탈하면서도 확실한 결말을 배치해 놨다.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지만,어느 아이가 모순된 상황을 일거에 해결해 버리듯 긴장이 일거에 해소되면서 어쩐지 웃음마저 나오는 결말이다. 이런 걸 개그(Gag)라고 하던가? 2007년에 정치인들이 선사한 치밀하면서도 허망했던 'BBK 개그'를 즐겨본 사람이라면, 정월에 찾아온 이 512쪽의 분량의 새 소설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해리스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1월 7일 초판/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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