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이나 평화로운 제목, 표지에 등장한 흑백사진의 주인공은 미모가 제법인 젊은 의사, 마치 모차르트의 'Eine kleine Nacht Musik'과 어울릴 것 같은 내용이 예상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평범한 의사가 아닌 '군의관'이며 시대는 월남전이 한창인 1968년부터 70년까지, 배경은 베트콩들의 야전 병원이다.

이쯤 되면 생각의 나래가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마련이다. 종군 일기나 영웅담, 혹은 이념에 투철한 투사의 자서전 쯤으로.

그러나 이 책은 달콤한 수필집도, 그렇다고 혁명의 교과서적인 작품도 아니다. 저자 당투이쩜의 '그냥' 일기장이다. 저자는 호치민이 통치하던 월맹(북베트남) 태생의 젊은 의사로, 이후 아직 자유민주정이던 월남(남베트남)에 내려와 지하공산군(베트콩) 활동에 뛰어들고, 전쟁의 참화와 줄곧 실려들어오는 젊다 못해 어린 부상병들을 보며 전율한다.

이런 참화 속에 '자원'해 내려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으니, 저자 스스로 일기에 고백하듯 실연으로 헤어진 월맹공산군 대위 M이 월남에 내려가 지하 활동 중이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열정과 확신 보다는 군의관으로 일하다 보면 M을 재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기대가 그녀를 전쟁터로 이끈 셈이다.

이런 모순된 참전 경로에서 보듯, 그녀는 스스로를 영리하고 고집센 아가씨로 생각하면서도 공산당 입당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초조해 하고, 의사이자 일선의 전사로서 죽음과 미군의 공세에도 의연하나 공산당 간부들이 자신을 저평가하는 것에 좌절하기도 하는 등 20대 평범한 처자로서 느낄 좌충우돌을 모두 표현한다. 일기라 더욱 정제되지 않은 채 쏟아진 탓도 있겠으나, 저자는 부상병들을 돌보면서 이들과 '우정 이상 사랑 이하'의 감정을 맺게 돼 다수의 '의남매 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이로 인해 “연애하느냐? 양다리 걸치느냐?”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도 받게 된다. 당의 간부로 급성장하고 싶어하면서도, 주변의 견제에 대해서 민감해 하고 자신이 오만하지는 않다고 자기변호도 하면서, 혁명적 이상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M을 만나고 싶어하고 늘상 그리워 하는 평범한 20대 아가씨로서의 감성도 갖고 있는 등 그녀의 마음 속에는 늘 여러 층의 그녀가 겹겹으로 쌓여 있고, 이들은 항상 충돌한다.

그러나 공산혁명을 꿈꾸는 베트콩으로서의 이상과 야전 군의관으로서의 이성, 연인과 헤어진 숙녀로서의 감성은 시간이 흐를 수록 점차 그 '황금배율'을 잡아 나간다. 일부 서평에는 단순한 연애감정을 이겨 내는 과정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녀는 죽는 날까지도 이런 여러 감정을 하나의 혁명 감정으로 '승화'하는 단계까지 나가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값어치가 줄지는 않는다. 오히려, 혼란기 젊은 처녀가 겪었던 감성의 변화 그래프로서 거의 유일무이한 사료이자, 전쟁과 미군에 대한 적개심조차도 인간의 기본 정서를 황폐화시킬 수 없다는 준엄한 진리를 강조하는 동시에, 이념의 뒤안길에서 울고 웃었던 당시 젊은 전사들의 감정을 여과없이 보여줌으로써, 무미건조한 전쟁의 뼈대에 사람의 피와 살을 붙여준 책으로 특이한 위상을 점유했다고 할까? 그리고 이런 면이 비록 월남전에서 자유정권의 편을 들어 베트콩들과 맞섰던 미국의 독자층이나 우리나라 독자층에게도 '입장과 이념은 다르지만' 세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공감되는 구석을 만들어 주는 게 아닌가 한다.

이 책 내부에서 늘상 징징 울어대는 이념과 감성의 싸움은, 굳이 전쟁이 아니더라도 늘 우리 인생사를 지배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이런 갈등이 극대화되고, 어느 한쪽이 한쪽을 눌러버리기 쉬운 인간성 파괴의 전쟁터에서도 이런 갈등과 그 조화의 묘를 찾아가는 기록이 놀랍다는 점이 이 책을 관통하는 미학이라고 하겠다. 이 점이 일기장인 탓에 누구를 가리키는지 아리송한 표현들이 난무하고, 때로 적군에 대한 지나친 적개심이 표현되는 대목, 정서가 통일된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 점 등 난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감동을 주는 이유라 하겠다.

책 서두에서 다소 혼란스럽다고 해도, 실망하지 말고 일독해 볼 것. 오히려 책 제목과는 딴판인 그 혼란한 감정의 터널에서 모차르트의 음악보다 더한 감미로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당 투이 쩜/도서출판 이룸/1월 15일 초판/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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