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순직 논설주간


정부는 4백29조원 규모의 내년 예산안을 지난 29일 발표했다. 문재인정부의 첫 나라살림 청사진이다. 취임 후 1백일 간 새 정부는 55건의 갖가지 정책을 발표했다. 그중 절반 정도가 경제 민생 등 엄청난 돈이 필요한 사안들이다. 이처럼 숨 가쁘게 쏟아낸 정책들은 대부분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공약으로 내세운 것들이다.
장밋빛 비전이 넘쳐나고 십년 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가실듯한 내용도 많다. 그래서 일각에선 이러한 약속들을 총망라하여 편성한 새해 예산안을 놓고 ‘문재인 산타클로스의 선물 보따리’라고 칭한다. 어쨌든 예산안은 새 정부의 국정철학을 집대성한 것이고 향후 5년간은 이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본다면 예산안의 내용은 정권의 성패와 국민의 생활과 직결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예산안의 주요 특징 몇 가지만 살펴보자. 우선 복지 관련 예산이 전체 예산의 3분의1을 넘어섬으로써 ‘복지 포퓰리즘 예산’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경제성장률을 초과한 예산증가율은 ‘수퍼예산’으로 불린다. 한번 지급하면 좀처럼 축소 또는 중단이 어려운 의무지출예산이 전체 예산의 절반을 넘어섬으로써 향후 예산 재정운용의 경직성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과거에 비해 성장 동력 발굴 의지가 약해졌다는 점이다. 신성장산업 핵심전략산업 6차산업 연구개발투자(R%&D) 등 미래 먹거리 산업육성을 위한 공격적인 재정의지가 미약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 부분은 문재인정부의 경제정책 기조가 성장위주에서 벗어나 복지 분배를 우선하여 성장을 추동하겠다는 이른바 ‘소득주도 성장 정책’이기 때문이다. 예산안과 관련하여 벌써부터 야당 측에서 반발이 심하고, 사회간접자본(SOC)예산 축소에 따른 지방의 반발 또한 심해 국회 심의 과정에서 진통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산타의 선물 보따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선물 보따리 등에 힘입어 국민들은 환호하고 문재인대통령의 지지율은 70%대의 고공행진을 지속하고 있다. 선물 하나 하나를 보면 국민 모두가 목말라하고 애타게 기다려온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 정부가 쉽게 접근하지 못한 것은 다른 정책과의 우선순위 문제와 소요재원 마련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선 후 문재인대통령은 인천공항공사를 방문, 공공부문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 제도화 약속을 시작으로 *요양원을 방문하여 국가치매책임제 도입 약속(이하 2022년까지 소요재원 2조원) *소방공무원 등 공무원 17만4천여명 증원( 8조원이상 소요) *최저임금 16.4%인상 추진으로 인상 여력이 없는 소기업 등에 3조원 보조 *문재인캐어로 불리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건보개편)으로 30조이상 소요 *기초연금 월30만원으로 확대 및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90만명 확대 (30조원) *근로시간 주당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계적 단축(12조원 보조) * 이밖에도 0~5세 아동수당 월 10만원 신설, 사병월급 인상 등 다수가 공약 또는 예산 사업에 포함되어 있다. 이같은 정책들이 국민과 기업들에게 큰 부담 주지 않고, 성장과 고용 소득증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차질 없이 추진된다면 어느 누가 반대할 것인가. 하지만 도처에 부작용과 복병이 도사리고 있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새해 예산안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문제점으로 예산의 경직성 심화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전체 예산 4백29조원 중에서 의무지출예산이 무려 2백18조원으로 그 비중이 50.8%를 넘어섰고, 2019년 51.9%, 2020년 52.3%, 2021년에 가면 무려 53% 로 높아질 것으로 추정됐다. 의무지출예산이란 공적연금 건강보험 지방교부세 교육재정교부금 국방비 인건비 복지예산 같은 분야로 법에 지급의무가 명시되기 때문에 한번 들어가기 시작하면 좀처럼 축소 또는 중단하기가 어려운 것이 특징이다. 특히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복지 분야 예산이 이미 전체의 3분의1을 차지함으로써 갈수록 고령화가 심해지는 우리 현실을 감안할 때 이 부문 예산 증대 욕구는 갈수록 높아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의무지출예산 비율이 높아진다는 것은 예산, 즉 재정운용이 탄력성을 잃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가 경기부양이나 성장 동력 확보 등을 위해 돈을 쓰려 해도 경직성예산에 발목이 잡혀 효율적이고 신축적인 재정정책을 펴기가 어려워진다. 이처럼 의무지출 비율이 상승한 것은 물론 새 정부가 공약 이행을 위해 복지예산을 대폭 늘렸기 때문이다. 보건 복지 노동 관련 내년 예산은 1백46조원으로 전체예산의 34.1%에 달한다. 올해보다 무려 13% 늘었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복지예산에 밀려 성장 엔진을 강화하는데 쓸 돈이 종전에 비해 현저히 줄었다는 점이다. 혁신성장 분야나 각광받는 6차산업은 물론, R&D예산 증가율이 극히 미미하여 새 정부가 미래의 산업 육성에 미온적이지 않느냐는 지적이다. 성장우선이냐, 분배우선이냐는 물론 선택의 문제이다. 그러나 지금의 ‘성장 패싱’성격의 정책은 먼 장래를 볼 때 걱정스러운 측면이 많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복지예산 확대에 치중하다 보니 다른 분야 예산의 축소가 불가피, 택한 것이 SOC예산의 대폭적인 삭감이다. SOC예산은 올해보다 무려 20%(4조4천억원)가 줄었고, R&D예산은 3천억원, 농림 분야에서도 6천억원 가까이가 깎였다. 그야말로 푸대접이다. 이처럼 사회간접자본 예산이 대폭 삭감되자 당장 야당쪽에서 반대하고 나섰다. 대구 경북과 광주 전남 등 지역에선 SOC예산 삭감으로 주요 사업들이 차질을 빚는다며 강력 반발하는 조짐이다. 예산국회가 순탄하지만은 않을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문재인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이다. 과거엔 주로 ‘선성장 후분배’를 기조로 기업 위주의 성장으로 일단 파이를 키우면 자연스럽게 그 열매가 서민 증산층으로 흘러간다는 ‘낙수효과’이론이었다. 그러나 새 정부의 이른바 J노믹스는 복지확대 고용의 질적 개선 등으로 서민층의 소득을 늘려 소비도 확장함으로서 수요확충을 통한 경제 활성화를 가져온다는 ‘분수효과’이론을 채택한 것이다. 이 이론에 관해서는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다. 어쨌든 국민의 선택을 받은 새 정부가 선택한 정책이 성공하길 바랄 뿐이다. 만에 하나 확대된 복지가 재정위기의 불씨가 되어 국민경제에 짐이 된다면 소득주도 성장정책의 실험은 실패할 것이고 문재인정부의 성패와도 직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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