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채 주필


9월 1일부터 은행에서 종이통장 없는 거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날부터 신규 계좌 개설시 통장 발급이 원칙적으로 중단됐기 때문이다. 국내 첫 상업은행인 한성은행이 종이통장을 발급한지 118년만이다. 하지만 발급 여부를 고객에게 물어 굳이 통장 발급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예외적으로 종이통장이 무료로 발급된다. 발급받지 않는 고객에게는 인센티브로 수수료 혜택 등을 준다. 그러나 3년 뒤인 2020년 9월부터는 통장 발급이 유료화된다.
이같은 조치는 모바일과 인터넷 뱅킹이 대중화하면서 종이통장이 사실상 무용지물로 변해 종이통장 발급 중단이 금융회사와 고객 모두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체 금융거래중에서 고객 10명중 9명이 ‘비대면 금융거래’를 이용하고 있다. 또한 계좌를 만들어 놓고 실제 사용하지 않는 비율도 상당히 높다. 3년이상 금융거래가 없고 잔액이 10만원 미만인 금융계좌가 무려 7천만개나 되고 통장의 절반 가량은 입출금이 없는 계좌다.
종이통장 발행 비용은 제작원가 300원에 인건비와 관리비 등을 포함할 경우 개당 5천~ 1만 8천원이나 된다. 종이통장을 없앨 경우, 통장 제작비 절감과 인력과 지점 줄이기 등으로 상당한 비용을 절약할 수 있게 된다.
고객 입장에서도 이익이다. 지금은 계좌를 개설할 때 종이통장이 무료로 발급되지만 분실해 재발급 받을 때는 보통 2000원의 수수료를 내야한다. 이 비용이 연간 60억원이나 된다. 또한 통장이 없으면 예금주 본인이 직접 영업점을 방문하더라도 통장 분실 절차를 거쳐야 출금이 가능하나 종이통장이 사라지면 이러한 불편이 사라지게 된다. 게다가 통장 분실로 거래 내역이 노출되거나 인감과 서명이 도용돼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도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이밖에 장기간 방치되는 미사용 통장은 대포통장 등으로 악용되는 사례가 많아 금융범죄 피해를 예방하는 이점도 있다. 2014년 5월부터 2015년 4월까지 1년간 대포통장 양도. 매매 의심 거래 건수는 무려 6만 9788건이나 되고 있다. 금융전산화에 따라 미국은 1990년대, 영국은 2000년대 들어 종이통장 발급을 중단했고 중국은 2010년대 들어 종이통장 미발급을 원칙으로 정하고 고객이 요청할 때만 발행주는 등 종이통장 없애기는 전세계적 추세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특히 아날로그 세대인 노인들이 종이통장 폐지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물론 디지털 금융 환경에 이미 완벽하게 적응한 고령층도 많이 있다. 그렇지 못한 노인들도 디지털 기술이 편리하다는 것만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오고 가는 불편이 있더라도 은행에 가서 직접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속 편하고 좋다는 고령층이 많은게 현실이다. 심지어 스마트폰으로 계좌이체 하는 것을 배웠으나 눈이 아파서 못하겠다는 노인들도 있다.
“무조건 문서로 확인해야 마음이 놓인다. 종이통장이 사라지면 불안할 것 같다”고 말하는 고령층이 상당하다. 물론 종이통장이 있어야 예금 지급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은행의 전산시스템은 백업시스템을 여러 곳에 분산시켜, 전쟁 발발 등으로 메인 전산시스템이 파괴되더라도 금융거래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끔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다. 따라서 고객들은 종이통장이 없더라도 거래 내역을 확인하거나 증빙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종이통장의 유무와 법적인 예금 지급 청구 권리는 서로 무관한 것이다.
하지만 고령층은 해킹이나 보이스피싱 등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갖고 있다. 이것이 이들의 금융 소외를 심화시키는 원인이기도 하지만 통장에 찍힌 거래내역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다 쓴 통장도 버리지 않고 모아 영수증처럼 간직하고 있는 것이 노인들의 삶이다. 노인이 아니라도 종이통장을 들춰가며 예금 잔액이 차곡차곡 늘어가는 희열을 만끽하거나 앞으로의 자금운용 계획을 세우는 사람도 많다.
요즘 디지털 세대인 젊은층이 인터넷 기사 보기를 선호하면서 신문 발행부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종이신문을 보는 사람은 꼭 본다. 인터넷으로 기사를 보면 감이 제대로 오지 않기 때문이다. 종이통장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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