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은경 작가


추석 전에 동회가 열리는데 우리는 동네에 들어온 지 처음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새벽 6시부터 회관 마이크가 오늘 11시에 동회가 열리는 것을 반복해서 알린다. 닷새 전부터 간헐적으로 마이크로 그 소식을 미리 전해 주었다.

이 곳 시골에서 가을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처음 이사 왔을 때 이장님한테 인사하려 했는데 바쁘니 나중에 만나자는 말에 내용도 모른 채 서운하기도 했다. 한창 포도와 복숭아를 수확해서 포장해 공판장에 가지고 나가는 시기와 겹쳤던 것이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조그만 포터 화물차가 포도니 복숭아니 적힌 상자를 가득 싣고 나가는 것을 몇 번 목격한 후에야 서울내기인 나도 대략 눈치를 챘다.

가을걷이가 끝난 때문인지 동회에 모인 마을 분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여유가 넘쳤다. 올해는 태풍도 없었고 과일에 적합한 날씨가 계속된 터라 과일을 주산지로 하는 이 곳 영천 추곡의 주민들은 편안한 가을을 맞이하는 것 같아 보였다. 11시에 만나 음식을 준비해서 12시에 식사를 하고 서로 담소도 한 후 1시에 정식 회의를 해서 전달 사항이나 협의 사항을 안건에 부치는 모양새였다.

여자노인네(70세에서 90세 이상까지)가 열두 명, 젊은 여자가 여섯 명 (여기서 젊다면 40대 후반에서 60대 후반까지?) 으로 일은 이 여섯 명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남자가 열두 명 정도니 전부 해서 30명 정도의 동네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하는 셈이다. 메뉴는 회 덮밥으로 영천 장에서 회를 뜨고 나머지 부분은 매운탕용으로 가져왔다. 채소는 상추와 양배추 오이 당근에 사근사근한 햇배를 일정한 길이로 길쭉하게 채 썰고 회와 함께 초고추장 넣어 비벼먹는 것이다. 설거지감도 많이 남지 않고 준비하기도 맞춤하니 훌륭한 메뉴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두 나이대의 여자들 중에서 중간 정도라고 생각됐다.

노인들이 남편의 어릴 적 얘기를 하며 아는 척을 해 주어 열심히 들었는데 나중에 남편에게 얘기를 전달하려니 얼굴과 이름이 서로 일치되질 않아 애먹었다. 하긴 한 번에 열 명 이상의 새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힘들다. 지금처럼 나이 들며 자꾸 잊어버려가는 이 시점에선 더욱이. 다시 젊은 측으로 합류해선 같이 일하며 얘기를 나누었다.

그 중에서 연고도 없이 이곳에 온 말하자면 나처럼 귀촌 주부들도 몇 명 되어 은근히 반가웠다. 난 그래도 남편의 고향이어서 온 것이 아닌가? 그이들은 남편들과 함께 귀촌을 준비하다가 여러 곳의 부동산 매물을 보고 나서 자신에게 맞는 듯해서 이쪽으로 왔다는 것이다. 나중 서로 더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늘 친구사귀기는 이제 그만.

저녁에 집 주위를 산보했다. 울타리 대신 심은 남천 주위로 나팔꽃 덩굴이 올라가며 예쁜 보라색 꽃을 피우고 있지 않은가? 저녁이라 수그러졌지 내일 아침엔 활짝 필 것 같았다. 그럼 몇 송이 꺾어서 책상 위에다 꽂아 놓아야지. 이건 내 꽃이니까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겠지? 감나무도 노랗고 붉은 감을 잔뜩 매달고 있다. 땅에 떨어진 감 중 먹을 만한 것을 골라 물에 씻어 입에 넣었다. 맛있다. 정말 맛있다. 나무에서 익은 과일은.
나무에 매달린 붉은 감도 딸 수 있게 장대를 구해 달라 해야지. 그 건 내 감나무니 어떻게 먹든 언제 먹든 내 맘대로 아닌가? 이런 소유의 기쁨은 지갑에 가진 지폐와는 비교될 수가 없다.

서쪽 하늘은 언제나처럼 붉게 물든다. 조금 높은 지역에 집이 위치해서인지 동쪽의 일출과 서쪽의 일몰이 둥글게 집을 감싸고 있다. 집 안으로 들어가 내가 좋아하는 시디를 꺼내 튼다.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라보엠이다. 로돌포가 미미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첫 장면. 그는 자신을 시인이라고, 창공에 높은 성을 가진 성주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나도 그래요. 창공에 그지없이 아름다운 궁전을 가지고 있어요. 당신은 누구신가요?
오늘 저마다의 성을 가진 영천 추곡의 성주들을 한 자리에서 만났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조은경 약력
△2015 계간문예 소설부문 신인상 수상
△소설 '메리고라운드' '환산정' '유적의 거리' '아버지의 땅'등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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