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순직 논설주간

문재인정부가 가장 우선순위를 두고 추진 중인 적폐(積弊)청산에 관한 피로감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청산 작업의 첨병이랄 수 있는 문무일검찰총장은 지난 17일 기자간담회에서 “정부의 여러 위원회나 개혁위에서 논의된 사안들이 계속 검찰에 넘어오는 상황이어서 업무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며 “수사를 길게 하면 피로감이 커질 것 같아서, 시한을 정하기는 어렵지만 내부논의를 거쳐 최대한 빨리 마치는 것을 목표로 수사팀 증원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적폐청산 수사 확대로 검찰 안팎에 피로감이 높아지는 데 대한 공개적인 우려 표명인 셈이다. 이낙연국무총리는 적폐청산 대응 지침을 정리해 부처에 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적폐청산이 정치보복으로 비쳐지는 것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그만큼 적폐청산을 보는 외부의 시선과 정권 내부의 의지가 다르고, 반발도 적지 않으며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피로감이 나타나고 있는데 대한 대응으로 보여 진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예외 없이 빼드는 개혁 부패척결 적폐청산 같은 서슬 퍼런 어젠다에 대해 대놓고 반발하기란 쉽지 않다. 드러나는 비위나 비리 실정 등이 거의 범죄수준이거나 국민들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사안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피로감이 나타나는 것은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민생은 뒷전이고 과거를 들춰 청산이네 처벌이네 하며 적폐청산에 매달리는 듯한 현상에 대한 불만인 것이다. 누군가의 입에서 나올 때가 됐다는 시기에 다른 사람도 아닌 검찰총장이 피로감을 우려한 것은 의미가 있다. 야당은 “정치보복이라 쓰고 적폐청산이라 읽는다”며 새 정부의 적폐청산을 비아냥대고 있다.
시공초월한 전방위 청산작업
문재인대통령의 관련 발언들을 보면 적폐청산 의지와 강도를 읽을 수 있다. “진정한 통합은 적폐를 덮고 가는 봉합이 아니다. 적폐를 확실히 청산하면서 민주주의 틀 안에서 포용하는 원칙 있는 통합이 중요하다” “우리 사회를 아주 불공정하게 불평등하게 만들었던 많은 반칙과 특권들을 일소하고 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만드는 것이 적폐청산이다. 이는 우리 정부 임기 내내 계속 되어야할 노력이다” “적폐청산은 정치보복이 아니다. 나도 정치보복을 당해봤기 때문에 정치보복은 단호히 반대한다. 그러나 실제로 비리가 불거져 나오는 데도 그것을 못하도록 막을 순 없다”
거의 모든 정부 부처가 문재인정부 출범 직후부터 적폐청산 태스크포스나 위원회를 구성, 가동 중이다. 국가정보원은 2012년 대선 댓글사건 등 정치개입 사건 재조사, 국세청은 노무현전대통령에 대한 검찰수사의 계기가 됐던 박연차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 배경, 법무, 검찰은 검찰의 과거 권한남용 및 인권침해, 교육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 과정 등 등 그야말로 이전 정권의 정책과 집행을 이 잡듯 살피는 중이다. 청산 대상도 박근혜정부(前정권)는 물론이고 이명박정부(前前정권) 시절까지 확대됐다. 적폐청산이라는 이름하에 전 현(前 現) 정권이 볼상 사나운 이전투구중이다.
잘못된 정책우선 순위가 피로감 앞당겨
청산의 전선(戰線)이 지나치게 확대된 느낌이다. ‘20년 과거 털기식’ 적폐청산은 검찰총장 지적대로 어느 세월에 끝낼지, 청산작업에 대거 인력을 투입함으로써 민생 등 다른 부문에 대한 소홀은 어떻게 할 것인지 걱정이다. 여기에다 부처별로 적폐청산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운영하다 보니 경쟁적으로 의무적으로 청산꺼리를 찾느라 본연의 업무는 뒷전이다. “저런 것까지 이제와서 들춰내야 하나”는 소리가 도처에서 들린다.
정부가 적폐청산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데 대한 비판도 없지 않다. 예컨대 박근혜전대통령의 구속기간 연장을 목전에 두고 대통령비서실장이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 보고시간 사후조작을 공개한 것이 한 사례다. 누가 봐도 타이밍상 법원에 구속연장을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처사였다. 그것도 비서실장이 직접 긴급 브리핑할 사안이었는지 의문이다.
새 정부들어 일자리가 최우선이라고 했지만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노동유연성의 후퇴 등으로 일자리가 늘기보다 기업들의 해외로의 이전이나 인원 축소 등으로 이어질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정부는 과거 털기식 청산에만 너무 치중하지 않나 하는 불만과 함께 개혁 피로감이 높아지는 것이다. 정책우선 순위가 민생이 아닌 적폐청산에 있고, 미래에 대한 비전보다 과거 정리에 더 비중이 높다면 70%대의 대통령 지지율에 어떻게 작용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적폐청산이라는 용어가 지겨워지기 전에...
적폐청산은 어느 선까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정부의 개혁은 ‘구악일소(舊惡一掃)’였다. 전두환신군부정권은 삼청교육대로 상징되는 사정과 대규모 공직자 숙정, 김영삼 김대중정부는 유신잔재와 군부독재잔재 청산, 노무현정부는 과거사정리였다. 어느 세력이나 정권을 잡으면 가장 먼저 전(前)정권과의 차별화에 나선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은 과거 정부와 다르고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점을 부각시키려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용어와 방법만 다를 뿐 개혁 혁신 등 내용은 대동소이다. 촛불혁명 덕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의 경우 만약 박근혜지지세력이 건재한다면 통치에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적폐청산이건 사정이건 전정권의 비판을 통해 자신들의 역량을 과시하려다 자칫 차별화가 지나쳐 과거를 아예 부정하고 처단함으로서 정치보복으로 흐를 가능성은 상존한다.
그렇다면 선진국들은 정치보복성 개혁이 없을까.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도 앞선 정권을 부정하고 정책을 폐기하는 사례가 많다. 오바마는 부시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개입을 비판하며 철군을 추진했다. 또 트럼프는 오바마의 주요 정책중 하나인 오바마케어를 폐지하고자 한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은 선진국의 경우 과거 정권의 정책이나 이념은 비판하고 청산하더라로 사람에 대한 평가나 처벌 등에는 매우 신중하다는 것이다. 27년간 옥살이를 한 끝에 집권한 남아공의 만델라는 구지배세력인 백인을 포함, 자신들을 억압했던 세력을 포용한 것까지 떠올리는 것은 무리한 주문일까.
우리의 경우 범죄 수준의 적폐까지 모두 덮고 넘어가자고 주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청산의 범위를 최소화하고 보복 인상을 주는 처벌 또한 삼가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정책우선순위를 먹고 사는 민생 쪽으로 옮겼으면 한다. 적폐청산은 엄정중립적인 인사들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단기간이 아닌 긴 시간을 두고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이뤄진 뒤 백서를 만들고 개선안을 만들어 활용해야 한다. 정권이 바뀌면 청산주체가 청산대상이 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때가 됐다. 남의 잘못을 청산하는 것 못지않게, 나는 청산 대상이 되지 않도록 철저한 자기관리가 더 중요하다. <투데이코리아 논설주간>
필자 약력
△동아일보 경제부장, 논설위원
△재정경제부 금융발전심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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